에피소드 1: 끝
AR 69년
펜레곤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세계에 종지부를 찍은 전쟁이 끝난 지 5년 후, 생존자들은 진정으로 끝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 기계, 지진, 그리고 휩쓸어가는 파도의 뒤를 따라, 봄은 여전히 찾아왔다. 누더기가 된 군복을 입은 군인들이 멀리 떨어져 있는 세기말적인 전선으로부터 돌아와 쌀과 빵을 구걸했다. 상인들은 상품을 교환하고 배를 먼 해안으로 보내, 금을 청구하고 장원을 세우며 고객의 빚을 계산했다. 경비병들은 언제나처럼 공포에 질려 칼에 손을 얹고 눈을 크게 뜬 채로 고위층 거주지의 거리와 주변 경계를 감시했다. 들판에는 여전히 파종과 수확이 필요했다; 비쩍 마른 일꾼들은 여전히 감독관의 엄한 눈 아래에서 곡식을 모으기 위해 애썼다. 빵과 우유의 가격은 조금씩 올라갔고, 가축과 사냥감은 점점 부족해졌으며, 들판에서 일해 집으로 가져가는 품삯은 그렇게 많지 않았고, 저녁이 되어도 남동쪽의 지평선이 정말로 어두워지는 일은 없었다. 테리시아에서 삶은 계속되었지만, 봄과 여름은 짧아지고, 온난한 달들은 온난한 몇 주로 압축되었으며, 이제 겨울에는 펜레곤에 눈이 내렸다.
그 대재앙을 목격한 테리시아에 있던 모두는 바로 그 날 세계가 끝났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삶은 계속되고 있었지만, 더 나은 방향으로 바뀌지는 않은 것 같았다. 사람들이 바랄 수 있는 최선은 상황이 계속해서 악화되지 않는 것이었다.
폭발 이후 5년이 지난 뒤, 케일라 빈-크룩은 펜레곤의 정부 관저에 홀로 앉아, 꺼져가는 불이 따스하게 파직거리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날의 안건은 모두 완료되었고 마지막으로 사적인 회의 하나만이 남아 있었기에, 그녀의 평의원들과 위원회 구성원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눈을 헤치며 떠났다. 그들은 펜레곤의 최신 장부, 인구 조사 수치, 그리고 원정 보고서 등 광을 낸 종이에 물을 타 묽게 만든 잉크로 휘갈긴 일련의 악몽과 함께 그녀를 혼자 남겨두었다 자르실은 가정교사들과 저녁 공부를 하기 위해 보내졌다.
마침내 혼자가 되었다. 케일라는 암울한 숫자를 나타내고 있는 곡물 보고서를 든 채로 그녀의 앞에 놓인 테이블 위에 펼쳐져 있는, 새롭게 그려진 동쪽 바다의 지도를 응시했다.
공허했다.
한때는 녹음이 우거졌던 아르고스 섬은 파도에 쓸려나간 현무암 첨탑 하나만이 남은 곳으로 전락했다. 상인 길드는 펜레곤과 바다를 가로지르는 먼 왕국들 사이의 오래된 무역로를 되살리고자 최근에 진행한 탐험을 강하게 요구했지만, 그들이 한때 물과 식량을 공급하기 위해 사용하던 작은 섬들은 바다에 삼켜졌거나 별들이 이상한 곳을 가리키고 있기에 찾을 수 없었다.
케일라는 곡물 보고서를 한쪽으로 던졌다. 그녀는 이미 거기에 무엇이 적혀 있을지를 알고 있었다. 수확은 끝났고 작년보다 적었으며, 작년의 보고는 그 전년보다 적었고, 그런 식으로 계속해서 그들이 알고 있던 세계가 끝난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서류는 펄럭이면서 도시가 내려다보이는 금이 간 창문 근처의 바닥에 떨어져내렸고, 안으로 조금씩 날려들어오는 눈송이가 그 위로 내려앉아 녹아내렸다.
눈. 케일라는 젊은 시절 탑 주변의 구릉지대에서 산책을 했던 것을 기억했다. 산맥, 고산지대의 숲, 바람. 겨울은 그녀가 우르자의 엄숙한 태도와 연관시켜 보려고 노력해 보았지만 그럴 수 없었던 냉혹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었다. 사실 케일라는 겨울을 싫어했다.
비록 증기 히터가 방 전체가 편안하게 느껴질 정도로 충분한 열을 뿜어냈지만, 케일라는 여전히 뼈에 사무치는 추위를 느꼈다. 그녀의 평의회는 그녀를 어두운 분위기로 몰아넣었다.
"신들이여, 이제는 얼마나 멀리에 있는 겁니까," 케일라는 중얼거렸다. 신들이 마지막으로 가깝게 느껴졌던 것이 언제였던가? 약탈되기 전의 크룩을 보라. 그곳의 첨탑들과 사람이 붐비던 시장을. 그녀로부터 뜯겨나간 고향을. 케일라는 창문을 닫았다. 향수가 오늘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 기억에는 약간의 혐오가 섞여 있었지만, 그것은 그녀의 기억 때문이 아니라 기억으로 인한 고통 때문이었다. 순간적인 방해로 인해, 그녀의 몽상에 이유가 생겼다.
방 문에서 정중하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그녀의 주의를 끌었다. 그 뒤를 이어 쏟아져 들어온 아드레날린의 매서운 홍수는 전날 밤의 준비에도 불구하고 뜻밖이었고, 특색도 없었으며, 달갑지도 않았다.
"뭐지?" 케일라는 노크 소리에 화답하며 말했다.
젊은 사환이 방 안으로 들어와 목청을 가다듬었다.
"마지막 회의 대상이 도착했습니다."
"들여보내라," 케일라가 말했다. 그녀는 손짓을 해 그를 물렸다. "그리고 다과를 가져오도록, 손님이 배가 고플 게 분명하니까."
사환은 몸을 숙여 인사한 다음 조용히 문을 닫고 방을 나갔다.
문이 다시 열리자, 손님이 발을 질질 끌면서 들어왔다. 케일라는 고개를 들어 죽은 사람을 쳐다보았다. 너덜너덜하고 바람을 맞아 해진 그의 코와 귀는 동상으로 검게 변했고, 그의 볼두덩이는 얼음에 깎여 벗겨져 있었다. 그녀가 수십 년 전에 알고 있던 건장하고 착실한 남자는 이제 부스러질 듯한 흰 머리카락을 가진, 비쩍 마른 뼈다귀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의 눈에는 여전히 생기가 돌고 있었고, 그의 목소리는 다른 사람으로 착각할 수가 없었다.
"안녕하십니까, 케일라. 건강하신 것 같군요."
케일라는 정중하고 공허한 미소를 지었다. "타우노스," 그녀가 말했다. "자네는 죽었는 줄 알았는데."
우르자의 전 조수가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어떻게 보자면, 그랬지요," 그가 말했다. 타우노스는 케일라에게는 생소하고 딱딱한 어투로 말했다. 젊었을 때 그는 항상 우르자와 대조적인 모습을 보였고, 그녀의 남편에 대한 사랑과 헌신으로 버릇이 잘못 든 사근사근한 사람처럼 여겨졌다. 이제 타우노스는 그의 흰 머리칼까지 우르자의 모습과 거의 똑같아 보였다.
케일라는 평의회 테이블을 향해 손짓했고, 그는 절뚝거리며 그곳으로 가 앉았다.
"제가 속해 있던 세계가 변해 왔군요." 타우노스는 자신의 망토로 몸을 감싸며 말했다. "이렇게 바다 가까이까지 눈이 올 줄은 몰랐습니다."
"세상은 변했지," 케일라가 그의 말을 정정했다.
"맞습니다, 그 말이 맞는 것 같군요," 타우노스가 얼굴을 찡그렸다. "하지만 그건 지나간 일입니다. 당신께 드릴 말도, 보여줄 것도 너무 많습니다." 그의 미소는 마치 살점이 떨어져나간 두개골의 그것처럼 보였다. 케일라는 전쟁이 끝난 이후로 그런 미소를 아주 많이 보아 왔다. 그 미소는 돌아온 병사들의 얼굴에, 그리고 납골 수레에 높이 쌓여 있는 망자들의 얼굴에 드리워져 있었다.
"어떤 것도 지나간 일이 아니야," 케일라가 말했다. "자네가 펜레곤으로 걸어들어왔다는 것이 증명하듯이 말이지."
타우노스가 대답할 틈도 없이 평의회의 회의실로 통하는 문이 열렸다. 사환 두 명이 민트 차와 작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고소한 빵이 담긴 수레를 밀고 들어왔다. 일단은, 저녁식사였다.
"저는 끝을 마주하기 직전에 그와 함께 있었습니다," 타우노스가 수레에서 빵 한 개를 집어들며 말했다.
"자네는 항상 내 남편과 가까운 사이였지."
"그는 악마가 이 세상을 차지하는 것을 막았습니다," 타우노스는 눈을 내리깐 채로 조용하지만 굳은 어조로 말했다. "그의 형제는
케일라는 차를 따랐다. "자네는 그가 내 아들을 안전하게 지켜 줄 거라고 했었지," 그녀가 말했다. 그녀는 자신의 컵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타우노스에게 찻주전자를 내밀었다. "난 그 아이를 두번 다시 보지 못했어."
"그는—" 타우노스는 목청을 가다듬었다. "하르빈은 부하들에게 모범을 보였습니다. 용감한 장교이자 훌륭한 조종사였죠."
"그 아이의 죽음은 좋은 죽음이었나?" 케일라가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고르고 차분했지만, 타우노스의 귀를 자르고 코에 동상을 입힌 바람보다도 더 차가웠다. "내 아들이 좋은 모범이었다면, 그 아이가 본보기가 되어 전쟁으로 첫째를 잃은 다른 어머니들의 고통을 덜어 주었길 바랄 뿐이네."
"그는 조종사로서—"
"하르빈이 하고 싶었던 것은 자기 아버지를 자랑스럽게 하는 게 전부였네," 케일라가 타우노스의 말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그 아이는 자기가 당신 같은 마법공학자가 아니라 조종사일 뿐이었기 때문에 아버지가 자기를 대수롭게 여기지 않을까 항상 걱정했지," 케일라가 말했다. "그 아이가 젊었을 때 하르빈은 내게 자신의 꿈을 말해 주곤 했지. 그 아이는 자신이 날 수 있을 것이라고, 그리고 집에 돌아올 때마다 아버지가 하늘을 나는 아들을 자랑스러워할 것이라고 꿈꿨지. 그 아이가 내 남편을 미소짓게 한 적이 있나, 타우노스? 그 아이가 죽기 전에, 아버지의 자랑스러운 아이가 되고 죽었나?"
"우르자는 하르빈을 위험에 처하게 하려 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왜 전쟁을 일으켜서 내 아들을 죽게 한 거지?" 케일라는 쏘아붙였다. 분노가 마치 들불처럼 그녀를 휘감았다. 그녀는 벽을 향해 컵을 내던졌고, 컵이 산산조각나는 소리가 방 전체에 메아리쳤다. 그녀가 분을 삭이는 동안 타우노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타우노스." 케일라는 원음에서 의미에 이르기까지 모든 음절을 또박또박 짚으면서 단어들을 입 밖으로 냈다. "분명하게 말해 두지. 난 나를 설득해 내 아들을 남편의 전쟁에서 죽게 만든 자네를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이네. 내 은총을 다시 받기 위한 여정은 당신이 이곳까지 찾아온 쓰라린 길보다 열 배나 길고 차가울 것이고."
"알겠습니다," 타우노스가 말했다.
"이제 내게 말하려고 했던 것을 말해 보게,"
타우노스는 망토의 주름 속으로 손을 뻗어 밀랍을 먹인 천 두루마리를 꺼냈다. 그는 그것을 탁자 위에 펼쳐, 두껍고 노랗게 변색된 오래된 종이 뭉치를 드러냈다. 가장자리는 수분으로 인해 조금 손상되어 있었지만, 내용물이 망쳐질 정도는 아니었다. 케일라는 그것들을 즉시 알아보았다.
"설계도로군," 케일라가 말했다. "내 남편의 작업물인가?"
"그리고 일부는 제 것입니다," 타우노스가 말했다. "떠나 있는 동안 제가 지니고 있었죠. 복수자들, 진흙 동상들 기억하십니까? 다양한 유형의 날개치기 날틀도 있고 말이죠" 타우노스는 밀랍을 먹인 천 두루마리에서 조심스럽게 페이지를 벗겨내 탁자 위에 늘어놓았다. "증기 엔진, 통신 타워, 선박, 기계, 그리고 그가 설계한 장치들입니다. 대부분은 전쟁을 위한 것이 분명하지만, 몇몇은 그가 언젠가 누릴 수 있을 것이라고 희망했던 평화를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게 마법석 없이는 쓸모없지," 케일라가 말했다. "우리가 펜레곤에
타우노스는 웃다가, 이내 케일라가 그를 웃기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기침을 했다. "맞습니다, 네, 물론이지요, 그리고 그 점에 대해서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저는 마법석을 어느 정도 회수할 수 있었고 어디에서 더 찾을 수 있는지도 알고 있습니다."
케일라의 시선이 타우노스로 향했다. 그녀는 손가락을 뾰족하게 마주대어 턱을 괴었다. 눈을 감았다.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가 얼마나 많은 곡식을 수확하든 얼마나 많은 물고기를 잡든 상관없이, 자네 같은 사람은 항상 배가 고프겠지. 말해 보게."
"붕괴 전, 아르기브는 테리시아에서 가장 많은 마법석을 비축하고 있었습니다," 타우노스가 말했다. "그들의 창고는 묻혀 있었지만, 제가 우르자의 서류에서 지도를 발견했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마법석들과 이 설계도들로, 저는 그것들을 파낼 수 있는 새로운 기계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타우노스는 케일라의 기억 속에 있는 젊은 시절의 그와 비슷하게 열정적이었다. 헝클어진 머리칼과 크게 뜬 눈이 동상에 걸린 코와 합쳐진 그의 모습은 마치 동화 속에 나오는 괴상한 생물과도 같아 보였다.
"무기는 없고, 도구만 만들었습니다," 타우노스가 말했다. "마법석을 사용해 채굴과 수확을 도와줄 자동장치들을 작동시킬 수 있습니다. 밤에 도시를 밝히는 데 사용할 수도 있고, 추위를 막기 위한 히터에 동력을 공급하는 데에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타우노스는 몸을 숙이며 케일라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우리는 펜레곤을 재건할 수 있습니다. 제가 이곳에 도착했을 때 당신의 경비병들은 제게 펜레곤의 빛을 본 사람들은 누구나 이 도시에서 환영을 받는다고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타우노스는 방을 가로질러 펜레곤의 벽 쪽을 가리켰다. 케일라는 그가 항구를 내려다보고 있는 등대를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저는 테리시아 전역에 그 빛을 퍼뜨릴 수 있도록 제 지식과 계획들을 제공하고 싶습니다."
케일라는 대답을 하지도, 타우노스의 손을 잡지도 않았다.
대격변 이후의 첫 해는 격동의 해였다. 펜레곤에서는 폭발로 인한 지진이 도시의 돌과 벽돌로 지어진 건물들 대부분을 무너뜨려, 그 잔해들이 그곳에서 거주하던 사람들의 위로 쏟아져내렸다. 펜레곤 항을 내려다보고 있는 아찔한 절벽 위에 자리한 강력한 성채인 사자의 전당 내부에 위치해 있던 왕과 그의 궁정은 바다 속으로 무너져내렸다. 그 뒤로 거대한 해일이 일어나 해안가를 강타하면서 도시의 거리를 훑고 지나가, 잔해와 생존자들을 깨끗이 쓸어냈다.
흔들림이 멈추고 물이 빠졌을 때 살아남은 몇 안 되는 귀족들 중 한 명이 케일라 빈-크룩이었다. 연합의 지도자의 아내이자 그녀 자신 또한 공주였기에, 도시의 통치권은 그녀에게 돌아갔다. 6년이라는 긴 시간이 지난 후에도, 그녀는 여전히 남겨진 자들의 도시 펜레곤을 이끄는 목자였다.
"자네는 내 남편처럼 말하는군," 케일라가 마침내 말을 꺼냈다. "그는 단지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고 싶어 했을 뿐이지."
"외람되지만," 타우노스가 말했다. "그가 당신께 전해 달라고 부탁한 전갈이 있습니다."
케일라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는 당신께, 어," 타우노스는 자신의 차를 홀짝였다. "'자신의 모습 그대로가 아니라, 자신이 되고자 했던 모습을 기억해 달라'는 말을 전해 달라고 했습니다."
케일라는 목소리를 망가뜨리지 않으면서도 날카롭고 격정적인 소리를 내며 웃었다. 잠시 동안 타우노스는 그것이 진정한 웃음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순간은 케일라가 말을 하는 것과 동시에 사라져 버렸다.
"그는 내가 아직도 어린 공주인 그대로라고 생각하고 있는 겐가?" 케일라가 말했다. "그와 그의 동생이 하고자 한 것이 모두 이 세계의 왕자가 되려고 하는 것이었는데." 케일라는 타우노스를 가리켰다. "자네는 그때도 지금의 나처럼 이를 잘 알고 있었지. 우리의 결혼 생활 내내, 그의 곁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낸 건 내가 아니라 자네였으니까."
타우노스는 침묵을 지켰다.
"내 남편과 그의 동생은 사람들에게 잔인한 선택을 강요했네," 케일라가 말했다. "그들은 둘 중 어느 쪽도 서로와 이야기를 할 수 없었기에 온 세상을 불태웠어." 그녀는 탁자 너머로 손을 뻗어 타우노스의 설계도 중 하나를 집어들었다. 그것은 직립형 자동기계로, 그녀가 기억에 따르면 크룩의 약탈과 파멸 이후에 우르자가 설계한 전쟁 형태 중 하나였다. 케일라는 남편의 정밀한 글씨체를 쳐다보았다. 그가 완벽하게 그은 선들을. 좋은 종이에 오래된 잉크로 그려져 있는 그 기계는 누군가가 활성화 명령을 말하기만 하면 페이지 밖으로 걸어나올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제 우리는 그 형제들의 재로부터 재건해야만 하지," 그녀가 페이지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나를 보게, 타우노스."
타우노스는 명령받은 대로 했다. 눈물이 그의 거칠어진 뺨을 따라 흘러내렸다.
"그만 울게," 케일라가 말했다. "자네와 나, 그리고 다른 모든 사람들은 내 남편과 그의 동생의 그늘 속에서 살았지. 테리시아는 그들의 전쟁으로 모든 것을 빼았겼고. 나는 내 아버지, 내 아들, 그리고 내 왕국을 잃었네. 내 삶을 구성하고 있던 모든 선하고 친절한 것들이 그 때문에 사라졌네." 그녀는 방 이곳저곳에 있는 벗겨지는 벽지, 덜걱거리는 증기 파이프와 여전히 바깥에서 내리고 있는 눈을 향해 손짓했다. "나는 내 남편의 죽음을 즐기지 않네. 죽음은 충분할 만큼 있었지. 하지만 나는 그가 떠난 것이 기쁘고, 그가 한 일을 용서하지 않을 걸세. 나는 그가 자신이 기억되기를 원한 방식으로 그를 기억하지 않을 걸세. 나는 그를 있는 그대로 기억할 걸세." 케일라의 목소리는 무쇠와도 같이 단호했다. 그녀는 타우노스의 축 처진 어깨에서 무언가를 보았다. 그것은 낙담한 그의 영혼과는 분명하게 구별되는 망설임이었다. "타우노스?" 그녀가 물었다. "내게 말하지 않은 게 뭐지?"
타우노스는 바람에 갈라진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눈에 또다시 눈물이 고였지만, 그는 눈을 깜빡여 눈물을 없앴다. "우르자는 죽지 않았습니다."
케일라의 관자놀이에서 맥박이 빨라졌고, 그녀가 이를 악문 힘은 돌마저도 깨부술 수 있을 것 같았다. 케일라를 크룩의 밝고 사랑스러운 공주로만 알고 있었던 타우노스에게, 그의 맞은편에 앉아 있는 여자의 강인함은 무시무시할 정도였다. 우르자는 세계를 망쳐놓았지만, 그가 가장 아프게 한 사람은 케일라 빈-크룩이었다.
"뭐라고?" 케일라의 목소리에 담긴 분노는 바늘처럼 날카로워져 있었다.
"그는 죽지 않았습니다," 타우노스가 말했다. "그는
"자네가 말하는 '무언가 다른 존재'라는 게 더 나은 사람인 겐가?"
"저는—저는 그가 무엇이 된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타우노스는 시선을 떨구면서 인정했다. 천천히, 그는 일어나서 널부러진 서류들을 긁어모아 다시 두루마리에 쑤셔넣기 시작했다.
"뭘 하고 있는 거지?"
타우노스가 동작을 멈췄다. "떠나려고 하는 겁니다."
케일라는 고개를 저였다. "아니, 타우노스. 앉게. 부탁하지."
타우노스는 앉았다.
"우리는 폭발 후에 남편의 공장에서 회수할 수 있는 것들을 회수했다네," 케일라가 말했다. "기계, 섀시, 돌, 그가 자신의 자동기계들을 대량으로 만드는 데 사용한 것들 말이네. 이곳에 있는 누구도 그것들을 사용하는 방법을 몰랐지만, 자네가 도착했으니, 이젠 거기에 변화가 생겼다고 봐야 하겠지." 케일라는 자신의 물건들을 챙긴 뒤 타우노스를 문까지 바래다주었다. "내일, 내 정찰대 대장인 마이렐에게 자네를 창고로 데려가 자네가 작업을 시작할 수 있게 하라고 하겠네."
"감사합니다, 케일라," 타우노스가 문 앞에 멈춰서서 말했다.
케일라는 입을 굳게 다물었고, 그녀의 표정에는 미소의 흔적조차 없었다. "먼 길이네, 타우노스," 그녀가 말했다. "가게. 춥다네."
타우노스는 기다리고 있던 사환을 따라 촛불이 켜진 암흑 속으로 떠났고, 케일라는 다시 한 번 혼자가 되었다.
몇 달이 지나 봄이 찾아왔고, 펜레곤은 다시 살아 있는 도시가 되었다. 커 능선을 언제나 뒤덮고 있는 안개의 장막 위로는 겨울의 눈이 하얗게 뒤덮여 있는 들쭉날쭉한 산봉우리들이 솟구쳐올라 있었다. 능선을 따라 시선을 돌리면, 한때는 고대 숲이었던 곳이 전쟁 중에 연료와 석탄을 얻기 위해 수확되어 뿌리와 그루터기만 남은 곳에서 새로운 싹들이 피어나고 있었다. 눈이 녹아서 불어난 개울은 산을 따라 흘러내려 펜레곤 외곽의 들판으로 흘러들어가, 오래된 방어용 참호에 물을 채워 새로운 얕은 호수를 만들었다. 한때는 돌과 금속, 그리고 불이 모든 것을 쓸어내버린 지옥 같은 전경을 드러내고 있던 옛 전장은 이제 섬세한 야생화가 여기저기에서 피어나는 초원이 되었다. 꽃 아래에는 수많은 망자들이 알려지지 않은 채로, 하지만 결코 잊히지는 않은 채로 누워 있었다. 새들이 몰려들어, 한때 우르자가 세웠던 낡고 쓰러질 것 같은 통신탑들에 둥지를 틀었다.
커 산맥의 산자락과 펜레곤 남쪽으로 이어지는 평야 근처에 위치한 불모지는 그곳이 전쟁에 쓰였던 최악의 기계들이 죽은 대지라는 것을 드러내고 있었다. 탁한 물 웅덩이 속에 크고 부식된 거대한 기계들이 늘어서 있었고, 그것들 위에는 끔찍하게 변이해 흘러내리면서 결코 얼어붙지 않는 이끼들이 달라붙어 있었다. 어떤 새들도 이 기계들의 시체 안에 겨울을 날 둥지를 만들지 않았다. 어떤 짐승들도 기름이 뒤덮인 물을 마시지 않았다. 그것들 주위의 공기에는 악취가 만연했고, 펜레곤의 정찰병들은 그들이 발견한 유해 주변에 조심스럽게 경계를 표시했다.
케일라는 타우노스를 옆에 두고 펜레곤의 새로운 내륙 성벽 꼭대기를 따라 거닐면서 난간 너머로 도시 요새의 이쪽 부분에서 진행되고 있는 작업을 바라보았다. 대격변 중에 대지가 뒤흔들릴 때 펜레곤의 고대 해자 속으로 무너져내려 빈틈이 생긴 오래된 돌벽을 메우기 위해 수백 명의 인부들이 일하고 있었다. 한때는 펜레곤의 기술자들이 가진 능력에 대한 강력한 증거였던 그 벽은, 몇 분 만에 무너져내렸다. 그것을 재건하는 일은 겨울의 추위가 잦아들기 전까지는 우선순위가 높지 않았다. 이번 봄은 따뜻한 날씨와 꽃들 이상을 가져다 줄 터였다. 또다른 위험이 펜레곤을 위협했다.
장거리 정찰대의 분대가 아침 일찍 도시로 돌아왔다. 도착을 기다리고 있던 케일라는 보고를 듣기 위해 벽에서 그들을 만났다. 타우노스는 공장에서 늦은 근무 시간을 마친 뒤 그녀의 부름에 응답하기 위해 서둘러서 달려왔다. 토루 위에서의 모임은 잡다한 사람들이 섞인 집단이 되어 있었다. 케일라는 바지를 입고 추위를 막기 위한 두터운 코트를 입고 있었고, 타우노스는 주조소의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으며, 정찰대 대장 마이렐은 어두운 판초 아래에 진흙투성이 제복을 입고 있었다. 마이렐은 오늘 아침에 임무에서 귀환했기에 여전히 천으로 감싼 흉갑과 칼을 착용하고 있었다.
"얼마나 많지?" 케일라가 대장에게 물었다.
"추정하기로는 일만 정도입니다," 마이렐이 말했다. "후미가 진을 갖추기도 전에 행군의 전열이 이미 산기슭에 도달했지만, 대열은 많아 봐야 5열 정도로 좁은 상태입니다."
"그리고 전사들은 얼마나 되는가?"
"별달리 구분이 되지 않았습니다," 마이렐이 말했다. "대부분은 곤봉, 창, 갑옷 파괴 기구, 그리고 전쟁에서 나온 대 메크 장창 같은 것들을 들고 있었습니다. 기수는 이삼백가량이었습니다." 마이렐은 어깨를 으쓱했다. "전문적인 군대는 아니지만, 갑옷을 입은 자들이 많았습니다. 옛 팔라지 갑옷, 코를리스 흉갑, 아르기브 중갑, 심지어 요티아 사슬갑옷도 좀 있었습니다. 생각하신 대로입니다. 조직적이기는 하지만 군대화되지는 않았습니다."
케일라는 아래의 공사 현장을 내려다보았다. 인부들과 기술자들은 타우노스가 만든 민간 자동기계의 초기 모델들 중 일부와 함께 도르래를 사용해 가면서 물에 잠긴 해자에 굴러 떨어진 거대한 돌덩어리들을 끌어올렸다. 다른 이들은 갈라져 있는 벽 틈으로 이전에 끌어올린 돌덩어리들, 갓 베어낸 목재, 그리고 자갈과 흙 바구니를 운반해 그 틈을 메웠다. 이 노동은 케일라의 명령에 따라 펜레곤의 내벽을 따라 퍼져나갔다. 지난 1년 동안에는 작업이 느렸지만, 타우노스의 새로운 자동기계들이 추가되면서 수리 속도가 빨라졌다.
"월말까지는 벽 수리를 마무리할 수 있을 겁니다," 타우노스가 마치 케일라의 생각이 들린다는 듯이 말했다.
"도시가 이 작업에 의지하고 있네," 케일라가 말했다. "평의회에게 이 작업을 완수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를 알려 주게. 마이렐 대장," 케일라가 그녀의 정찰대 대장에게 몸을 돌리며 말했다. "행군에 색이 보이던가?"
"그들은 양쪽의 깃발을 모두 걸고 있었습니다," 마이렐이 말했다. "하지만 가장 흔한 것은 평범한 검은색 깃발이었습니다. 그들은 또한 기계의 유해들도 걸어 두고 있었습니다."
"유해?" 타우노스가 물었다.
"자동기계 부품들 말입니다," 마이렐이 말했다. 그들은 얼굴을 찡그렸다. "붉은 여인의 창조물뿐만 아니라, 우리에 넣어 운반하거나 철사로 결박한 것도 있더군요."
"개조 장치로군요," 타우노스가 말했다. "애쉬노드의 끔찍한 작업물입니다."
케일라는 그 이름을 알고는 있었지만, 지나가는 말로만 들었을 뿐이었다. 그는 전쟁 중에 미쉬라를 위해 일했던 사람이었다. 그가 붙잡혔을 때 그를 고문한 자였기도 했다. 소문이 사실이라면, 그의 연인이기도 했다.
"타우노스," 케일라가 늙은 기능공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자동기계들, 자네의 인부들 말이네. 그것들을 펜레곤 방어로 전환할 수 있는가?"
타우노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 말은, 저들이 싸울 수 있냐는 말씀이십니까?"
"그렇네."
"가능합니다. 시간만 좀 있으면, 인부들이 무기를 들 수 있게 재구성할 수 있습니다." 그는 망설였다. "그렇게 해야 할까요?"
"아직은 아니네," 케일라가 말했다. "하지만 준비는 해 두어야겠지."
"기능공들을 임무에 투입하겠습니다."
"대장?" 케일라가 마이렐에게 말했다. "자네와 정찰병들은 휴식을 취하도록 하게. 내일 다시 오도록, 이 대열을 계속 주시하면서 그들의 움직임을 매일 보고하게. 그들이 펜레곤으로 가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곳으로 가는 것인지를 알아야 하네." 케일라는 남쪽의 산맥을 쳐다보았다. 아직 겨울인 산봉우리들 뒤로, 행렬이 모여들어 있었다. 한 달 안에, 통로가 녹을 터였고, 그렇게 되면 저 누더기 행렬은 이내 펜레곤의 벽 앞에 나타나게 될 터였다.
몇 년 만에 처음으로, 케일라는 도시 재건이라는 무거운 짐으로 인한 둔한 고통 이상의 것을 느꼈다. 그녀가 느낀 것은 더 날카롭고 더 씁쓸했다. 비록 그녀는 기껏해야 한 시간밖에 자지 못했지만, 그 느낌은 오늘 아침 동이 트기 훨씬 전에 그녀를 깨웠다. 그것은 두려움이었다.
두 달 후, 엉망진창인 행렬은 펜레곤 외곽의 진흙밭을 지났고, 그들이 지나가며 내는 발걸음, 말, 그리고 길게 늘어선 수레의 소리가 낮게 우르릉댔다. 행럴에서는 도로의 먼지 대신 희미한 함성이 솟구쳐올랐고, 수많은 노래와 행진 구호들이 각자 행렬의 목소리가 되고자 하면서 서로 경쟁해댔다. 인간과 짐승이 한데 어울려, 기도를 올리거나 또는 고뇌에 차서, 굶주렸거나 또는 저항하면서, 기쁨이나 케일라의 귀에 들리기에는 무의미한 말을 소리높이 외쳤다. 그것은 정신 착란, 대혼란, 전쟁과 공포, 그리고 구원의 소리였다. 그것은 케일라에게 미쉬라의 군대가 크룩을 공격했던 아침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그녀가 태어난 도시가 죽을 때 어떤 소리가 들리면서 폐허가, 무덤이, 상징이 되었는지를 말이다.
케일라는 만 명이 냉정한 추측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가 행렬을 정찰했다면 그는 10만 명 정도는 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했을 터였다. 펜레곤과 커 산맥 사이에 있는 강가에 위치한 초원을 건너기 위해 남쪽으로부터 밀려들어오는 어두운 옷의 행렬은 그 끝이 어디인지도 알 수 없었고 매우 위압적으로 보였다. 그 행진은 그녀에게 오래된 벌집에서 새로운 벌집으로 이동할 때에 일반 개미들 사이에 여왕을 숨긴 채로 일꾼들과 전사들의 끊기지 않는 줄을 형성해 이동하는 방법을 사용하는 개미들을 떠올리게 했다. 이번 행렬도 그것과 똑같은 것일까? 여왕은 누구였고 전사들은 어디에 있던 것일까?
케일라는 정찰 부대의 대장이 이 거대한 집회를 군대나 이주라고 부르지 못하는 불확실성에 공감했다. 마이렐의 쌍안경의 도움을 받아, 케일라는 노인과 아이들을, 회수하거나 즉석에서 만든 갑옷을 입은 수많은 사람들을, 누더기만을 걸치고 있는 몇몇을 보았다. 그들은 앞으로 나아가는 힘에 의해 조직된 거대한 덩어리가 되어 함께 행진했다. 그녀가 젊었던 시절의 난민 부대처럼, 이 부글거리는 인간들의 강은 그 자체로 하나의 생명체였고, 그 존재의 유일한 추진력은 함께 있으면서 계속 움직이는 것이었다. 얼마 후, 케일라는 행진을 관찰하는 과정에서 몇 가지 패턴을 알아차렸다. 기수들은 사람들의 옆에서 이리저리 달리면서 전갈을 나르고, 물과 여분의 담요를 나눠주며, 너무 지쳤거나 아니면 혼자서는 행진을 계속할 수 없는 사람들을 뒤에서 행진을 따라가는 수레들의 긴 행렬로 실어날랐다. 이 기수들이 마치 목축견들이 가축을 안내하는 것처럼 대열의 진로를 지켰다.
"영주님," 마이렐이 케일라의 주의를 끌었다. 그들은 펜레곤의 문을 향해 말을 몰기 시작한, 검은 갑옷을 두르고 있는 적은 수의 기수들 쪽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다섯 명뿐이었고, 모두 무장을 갖추고 있었다. 한 명은 검은 깃발이 뾰족한 강철 꼭지점에서 펄럭이며 그 아래에는 흰색 나사가 묶여 있는 전쟁에서 사용했던 구식 대 메크 전술이었던 창을 들고 있었다.
"사절이로군," 케일라가 말했다. "대장, 정찰 부대를 데리고 오게. 가서 저 행렬을 만나도록 하지."
케일라와 그녀를 호위하는 정찰대는 성벽을 타고내려와, 긴 행렬을 보기 위해 벽으로 서둘러 달려가고 있는 사람들이 붐비는 봄철의 펜레곤 거리를 뚫고 지나갔다. 케일라와 그녀의 경비병들이 지나가자 사람들은 질문과 격려의 말을 외쳤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펜레곤의 영주가 자신을 쳐다봐 주는 것으로 만족했다. 열정적인 사람들은 케일라의 눈길에 용기를 얻어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자신이 이끄는 사람들에게 있어 자신이 살아 있는 순교자, 세계를 죽인 자가 죽고 나서 생존자들을 이끌고 성역을 개척한, 그의 잊혀진 아내라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곳은 온화한 곳은 아니지만 안전한 곳이었다. 다른 사람에게는 알리지 않았지만, 케일라는 사람들이 그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싫었다. 그녀는 잊혀진, 슬픔에 잠긴 아내 그 이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각의 응원하는 사람들, 그녀가 관문으로 향하는 길에 지나쳤던 각각의 희망적이거나 두려운 얼굴은 결단이라는 쇠못을 그녀의 안에 더 깊이 박아넣었다. 그녀는 앞에 놓인 그 어떤 역경 속에서도 펜레곤을 안전하게 보호할 작정이었다.
관문에서 사람들을 비켜나게 하는 일은 약간의 고함과 밀어냄이 필요했지만, 정찰대는 그녀를 펜레곤으로 통하는 더 큰 돌과 철제 쇠창살로부터 잘라낸 문이 열려 있는 앞쪽으로 안내할 수 있었다. 그녀는 몸을 숙인 뒤 도시의 경비병들이 줄지어 기다리고 있는 자갈길 위로 걸어 나갔다. 마이렐 대위는 서둘러 케일라의 곁으로 간 뒤 정찰병들에게 똑같이 하라고 명령했다. 케일라의 수행원들은 그녀가 지나갈 수 있도록 반으로 갈라졌다. 행렬에서 찾아온 검은 갑옷의 사절단은 불과 몇 야드밖에 되지 않는 황무지의 맞은편에서 그녀를 만나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케일라는 그들의 악취에 코를 찡그렸고, 반사적인 행동이 지나간 뒤 표정을 추스렸다. 사절단은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그들은 안장에 높이 솟은 뿔에 몸을 기댄 채로, 그녀의 뒤에 있는 도시를 향해 몸을 숙이고 기다렸다.
"펜레곤에 잘 왔네," 케일라가 사이에 있는 공간 너머까지 들릴 수 있도록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사절들의 뒤에서 우르릉거리는 행진 소리는 그다지 반가워하지 않는 것 않았고, 그 새로운 배경은 케일라의 목 뒤에 있는 작은 털들을 곤두서게 했다.
"세 가지 조건 하에 모두를 우리의 벽 안에 받아들일 수 있네. 무기를 반납하고, 몸가짐을 바르게 하며, 펜레곤의 안녕에 기여해야 하네," 케일라가 말했다. 그녀는 사절단들 중에서 누가 그들의 지도자 역할을 맡고 있는지를 찾아보려 했지만, 그들은 표식, 색깔, 갑옷을 다양하게 섞어서 입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신분이나 장식 같은 표시를 봐서는 뜻하는 바를 이룰 수 없었다. 이 세계에서 사라진지 오래였던 의전, 깃발, 가문의 인장 등 에 대한 케일라의 오래된 지식은 그녀의 혼란을 증가시키는 데 도움이 될 뿐이었다. 그녀는 수선한 강습병의 갑옷을 입고 있는 남자의 몸집과 장비, 그리고 태도를 통해 그를 그들의 지도자로 가정하고 그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우리는 참회하는 자들이다." 철 갑옷을 입은 남자가 먼저 말을 꺼냈다. 그는 나이가 많았고 힘든 삶에 시달린 듯한 모습이었다. 그의 머리칼은 희끗희끗했고, 얕은 화상이 거미줄처럼 얽힌 흉터 사이로는 검은 수염이 자라고 있었다. 케일라는 이전에 몇몇 참전 용사들로부터 비슷한 상처를 본 적이 있었다. 그들은 기계들이 서로에게 끔찍한 에너지 무기를 휘두를 때에 마지막까지 그곳에 있던 사람들이었다.
"우리는 정의로운 순례자들이다," 그 남자는 케일라 너머에 있는, 펜레곤의 벽에 늘어서 있는 경비병들과 사람들을 향해 말을 이어나갔다. "우리는 테리시아의 산 자들이며, 기계의 오물로 뒤덮인 이 대지를 청소하고자 한다." 성벽으로 시선을 향한 그는 어두운 색을 띤 돌을 둘러보면서 그곳에 있는 각각의 사람들을 하나씩 주시했다. "우리는 코를리스를 해방시켰고 철의 순례길을 행진했다. 우리는 평화와 요구사항을 가지고 당신들에게 다가가고자 한다. 기계를 미워하고 두려워하는 모든 사람이 우리의 성전에 동참해 주기를 바란다." 그 남자의 목소리는 면도칼처럼 날이 선, 명확하고 억센 지도자의 목소리였다. 그는 그녀가 아니라 펜레곤의 사람들에게 말하고 있었고, 케일라는 그의 잔인함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녀는 그녀의 시민들도 그럴 수 있기를 바랬다. "우리도 당신들과 같다. 우리 또한 기계 악마들과 그들의 창조자들이 만들어낸 파멸로부터 살아남은 생존자들이다. 우리들 중 많은 사람들이 전쟁 중에 서로에 맞서 싸웠지만, 종말을 계기로 우리는 이제 우리가 공유하는 인간성을 알아차렸다. 우리를 두려워하지 마라. 우리와 함께하자."
지도자의 수행원 중 한 명인 검은 깃발을 든 남자가 말을 앞으로 몰았다. 케일라의 정찰병들은 뒤로 물러서면서 칼을 뽑을 준비를 했다. 기수는 고삐를 당겨 말로 팽팽하게 원을 그리며 돌면서 검은 깃발을 높이 들어 펜레곤을 향해 경례를 했다. 다른 기수들은 그들의 영광을 기리는 함성을 세 번 지르며 환호했다.
벽을 따라 몰려든 호기심 많은 군중들로부터는 환호성이 이어지지 않았다. 대신 멀리서 들려오는 행진 소리가 공간을 가득 메웠다. 거세게 부는 바람에 검은 천이 채찍을 휘두른 것과도 같은 큰 소리를 내며 뜯겨져나갔다. 케일라는 이마를 찌푸리고 깃발을 읽으면서, 그것이 단순한 검은 칠 이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 위에는 멀리서는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어두운 파란색으로 수놓아진, 두 개의 원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케일라 영주님," 말하던 자가 마침내 케일라를 향해 말했다. 잠시 동안 그녀는 그가 그녀의 이름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녀는 그들을 도적, 약탈자, 심지어 그녀의 정찰병들이 그녀에게 현재 테리시아 내륙을 지배하고 있다고 말한 서부의 전쟁군주들 중 한 명일 수도 있다고 추정했었다. "저는 크룩의 라딕입니다." 케일라에게 그의 목소리는 특색이 없었고, 이 때문에 그는 남쪽의 요티아에서부터 북동쪽 멀리에 있는 작은 아르기비아 부락에 이르기까지 어디에서든 왔을 수 있었다. "당신은 저를 모르지만, 저는 두 번째 스와르디 원정 기간 동안 당신의 아버지 밑에서 복무했습니다." 라딕이 말했다. 그의 말에는 케일라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평범한 민간 장교들과 같이 거친 우아함이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 또한 전성기에는 그들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는 올곧은 지도력과 통치를 보이며 거친 우아함을 두른 사람이었다.
이 남자가 낯이 익어 보이는 것 또한 당연한 일이었다.
"자네는 요티아 출신인가?" 케일라가 물었다.
"네, 그랬습니다," 라딕이 말했다. "저는 크룩의 약탈 이후에 커 산맥 남부를 떠돌아다녔습니다. 그곳에서 코를리스인들이 955년에 토마쿨 원정을 떠날 때 저희를 징집하기 전까지 지냈던 고향을 찾았습니다. 그는 놋쇠 모자를 쓴 남자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참호에서 아라를 만났지만, 대격변이 끝나기 전까지는 서로를 다시 보지 못했습니다." 라딕은 흉터가 허락하는 한에서 씩 하고 웃었다. "패배한 뒤, 저는 전쟁의 남은 기간을 팔라지 작업 캠프에서 보냈습니다."
"대단한 여정이었군," 케일라가 건성으로 말했다.
"살아 있는 자들은 전부 이와 같은 고통을 겪었지요," 라딕이 동의했다.
"그리고 이건 뭐지?" 케일라가 멀리 있는 행렬 쪽을 가리키며 물었다. "노병들을 모은 또다른 군대인가? 아니면 다른 무언가인가?"
라딕은 고개를 들어, 마치 그들의 작은 정상회담을 지켜보는 군중들의 시선을 의식한다는 듯이 벽을 올려다보았다.
"저는 솔직한 진실을 말했습니다, 케일라 영주님." 라딕이 말했다. "저희는 인류를 위한 전사들입니다. 마도사, 살아있지 않은 자, 그리고 기계 악마들에 대항하는 성전사들이죠." 라딕은 그의 왼손을 자신의 심장에 들어올렸고, 케일라는 그의 손가락이 짧아져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필시 어떤 전투에서 잘려졌을 터였다. "저희는 북쪽 끝에 있는 긱스인들의 땅을 정화해 기름과 기계로 세워진 끔찍한 신전을 비워내는 것으로 성전을 시작했습니다," 라딕이 말했다. "그리고 나서 저희는 옛 팔라지 제국이었던 사막을 행진했고, 그 후에는 아름다웠던 크룩의 폐허를 지나갔습니다. 코를리스가 뒤따랐습니다. 저희는 그곳을 잔인한 기계 전쟁군주로부터 해방시켰고 저희의 대의 아래 많은 사람들을 모집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무쇠 탑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그곳은 방어 장관이," 라딕은 우르자의 옛 칭호를 비꼬듯이 내뱉었다, "한때 그의 기계 악마들을 탄생시켜 세상에 풀어놓았던 곳이죠. 저희는 오직 음식, 물, 그리고 당신이 나눠줄 수 있는 다른 보급품들만을 바랍니다. 거기에 더불어 제 사제들이 거리에 들어가 사람들에게 전도하며 믿음 있는 자들이 저희의 성전에 동참하게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무쇠 탑이라고 했나?" 케일라는 라딕의 요청을 무시한 채로 물었다.
"그곳을 아십니까?" 그는 말을 부드럽게 하려는 기색도 없이 되물었다.
그녀가 그곳을 알고 있냐고? 그는 우르자의 옛 탑을 말하는 것이었다. "몇 년 전에 그곳에 한 번 데려가진 적이 있었지," 케일라가 말했다. "하지만 그곳으로 가는 길을 알려줄 수는 없겠네. 그곳은 서쪽이나 남서쪽 어딘가의 산 속에 잘 숨겨져 있지. 그곳을 둘러싸고 있는 짙은 안개를 보면 알 수 있을 걸세."
"당신의 남편은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라딕이 말했다.
케일라는 화를 냈다. "맞아, 우르자는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네."
"그럼 저희와 함께 가지 않으시겠습니까?" 라딕이 말했다. "저희에게 길을 알려 주고, 병사를 빌려주십시오. 함께 이 세계에서 기계들을 몰아내는 겁니다."
케일라는 라딕 너머 저 멀리 천천히 움직이고 있는 행렬 쪽을, 그 인간 덩어리를 쳐다보았다. 무거운 짐, 무기, 걷기에는 너무 약한 노인이나 너무 어린 아이들이 무언가를 나르고 있었다. 전쟁은 너무나도 많은 것들을 망쳐 놓았다. 이 불쌍한 사람들을. 케일라는 더 이상 그들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녀는 이해했다. 기계에 대한 라딕의 증오는 그녀가 품고 있는 증오와 같은 것이었지만, 오직 그만이 그 피비린내 나는 불타오르는 감정을 자유롭게 따라갈 수 있었다. 케일라에게는 이끌어야 할 도시가, 재건해야 할 세계가 있었다. 그녀의 앞에 있는 것은 채워야 할 무덤이 아니었다.
"나는 그렇게 할 수 없네," 케일라는 그 광경으로부터 눈을 돌리며 말했다. "나는 펜레곤의 여왕 섭정이지, 전사도 아니고 걸출한 지휘관도 아니네. 하지만, 나는 기꺼이 거래할 용의가 있네. 우리에겐 상품이, 음식이, 장인들이 있네," 케일라가 말했다. "자네의 백성들은 자유롭게 우리 도시에서 피난처를 찾을 수 있지만, 병사들은 도시 안에 들어오지 않기를 요청하네. 무기는 그 어느 것도 도시의 관문을 통과할 수 없네."
라딕은 말에 올라탄 상태에서 가능한 최대의 예를 표했다. "당신의 관용은 길이 기억될 것입니다," 그가 말했다. "당신의 인류애에 대해 탈에게 감사를 돌립니다."
탈. 요티아의 오래된 신이자, 태양과 관련이 있는 존재. 케일라는 그 이름을 알아봤지만 그 신에 대한 어떤 위대한 종교단체나 기념물도 기억하지 못했다. 세상의 종말은 모든 종류의 이상한 것들을 뒤흔들어 으슥한 구석에 숨어 있던 것들을 드러냈다.
"자네는 우리 모두를 위한 여정에 나선 것이네," 케일라가 말했다. 정중하고, 중립적인 말이었다. "펜레곤은 자네가 가는 길을 응원하네."
라딕은 그녀의 외교적인 언어를 이해하고 씩 웃었다. 그는 혀를 차서 타고 있는 말의 방향을 돌렸다. 그의 경비원들도 그 뒤를 따랐다. 그는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로 짧아진 손을 하늘로 치켜들어, 반은 손을 흔들고 반은 경례를 하는 것 같은 느릿느릿한 몸짓을 했다. 작별이었다, 일단은.
케일라는 자신의 수행원들의 호위를 받으면서 관문을 지나 펜레곤의 안전 지역으로 되돌아갔다. 벽 위에 있던 군중들은 흥분, 호기심, 허세, 두려움이 뒤섞여 빗줄기처럼 쏟아져내리는 합창 소리로 떠들었다. 그것은 결과가 정해지기 전에 먼저 결정을 따랐을 때의 소리였다. 케일라는 자신이 올바른 결정을 내렸기만을, 그녀의 관용이 잘못된 것이었다고 증명되는 날이 오지 않기를 바랬다.
평화가 지속된 것은 하루뿐이었고 비명소리로 끝이 났다. 케일라는 처음에는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녀는 펜레곤의 어부 길드와 회의를 하면서 서로 상대방이 자신의 그물을 잘랐다고 비난하면서 싸우는 사람들을 중재하느라 바빴다. 육지에 기반을 둔 사냥이나 농업과는 달리, 어업은 대격변으로 인해 가혹해지지 않았다. 전쟁 전에는 가난했던 어부들은 전쟁 후에 엄청나게 부유해졌다. 세상의 많은 부분이 꺼져 가는 촛불처럼 시들어 가면서, 물고기는 이를 수확하기 위해 오랜 시간을 일하는 선원들에 의한 심한 경쟁을 초래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계약, 어업권, 그리고 배를 만들기 위한 목재와 관련된 논쟁만큼 잔인한 싸움이 조선소에서 발생한 적은 없었다. 타우노스가 평의회 회의실에 들어갔을 때 케일라는 짜증을 내며 두 손을 치켜들고 있었다.
"아, 다행이군," 케일라가 말했다. 길드장들은 고함을 치고 있어서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터였기에 그녀는 아무런 걱정 없이 말했다. "불행에서 짜증으로 옮겨가는 일만큼 좋은 게 없지." 케일라는 일어나 그에게 평의회 회의실에서 나가라고 손짓하면서 서둘러 기능공에게 다가갔다. "저들은 괜찮을 걸세," 케일라는 그가 논쟁을 벌이고 있는 길드장들을 쳐다보자 그를 안심시키며 말했다. "언젠가는 결판을 내던가, 아니면 경비병들이 개입하겠지." 케일라는 타우노스의 팔을 잡은 채로, 위험한 해협을 항해하는 선박 조종사와 같은 결의로 그를 안내하면서 그와 함께 복도를 걸어갔다. 그녀는 안개에 싸인 커 산맥이 드리워져 있는, 펜레곤 내륙이 내려다보이는 좁은 창문 옆에 멈춰 섰다.
타우노스는 멈칫했고, 그 모습은 케일라의 안도를 걱정으로 바꿔 놓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즐거운 어조를 유지했다. 목소리가 돌로 된 복도에 울려퍼졌다. "자, 말해 보게," 케일라가 말했다. "자네를 공장에서 나오게 할 만큼 중요한 일이 무언가?"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타우노스가 말했다. "시장에 있던 탈 교도들 무리가 제 인부 중 하나를 공격했습니다."
케일라는 욕설을 내뱉었다. "그게—"
"아니오," 타우노스가 말했다. "도시에 있는 어떤 모델도 전투와 관련된 훈련을 받거나 장비를 갖추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맞서 싸우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도시 경비병이 있었죠." 타우노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그들 말고 다른 사람들이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복도를 살펴보았다. "순례자 중 두 명이 사망하고 우리 경비원 한 명이 부상을 입었습니다. 목숨에는 지장이 없을 겁니다. 그 지역 근처에 있던 나머지 순례자들은 체포되었습니다."
케일라는 창문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 시점에서 보았을 때에는 아무것도 달라 보이지 않았다. 행렬은 펜레곤 외곽의 들판에서 느려지거나 멈췄고, 얇은 회색빛을 띤 모닥불 연기가 바람에 실려 올라가고 있었다. 펜레곤 전역에 있는 굴뚝들의 꼭대기에서 요리용 불과 공업용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사람들은 각자의 일로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비록 타우노스가 가져온 소식이 그 광경을 불길한 색조로 물들였음에도, 그것은 평범한 봄날의 저녁이었다.
"그들 중에 공격을 목격한 자가 있는가?"
"그곳에 사람들이 수십 명이 있었습니다," 타우노스가 말했다. "행렬이 이 일에 대해서 듣지 못한다고 하면 그게 더 놀랍겠지요."
케일라는 다시 한번 욕설을 내뱉었다. "탈 교도들이 이유 없이 인부를 공격했다고?"
"네," 타우노스가 말했다. "그들은 그것을 악마라고 불렀습니다. 그들은 가까스로 그것의 무릎 관절 하나를 손상시켰지만, 심각하지는 않았습니다. 오후 한나절이면 수리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좋네," 케일라가 말했다. "이 일을 크게 만들지 않게 해야 하겠네. 나는—"
외침 소리가 청사 안에 메아리쳤다. 문이 쾅 소리를 내며 열렸고, 그 뒤를 이어 맨 아래층에서 장화를 신은 발소리가 들려 왔다. 케일라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타우노스를, 그 다음에는 아래층으로 향하는 계단이 위치한 구석진 복도 끝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그 구석에서 나타날 사람이 누구일지에 대비했다.
"영주님! 케일라 영주님!"
케일라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벽에 몸을 약간 기댔다. 마이렐이었다.
"여기 있네," 케일라가 화답했다. 그녀는 손을 뻗어 타우노스의 어깨를 두드렸다. "침착하게," 그녀가 조용히 말했다. 타우노스는 꽉 쥐었던 주먹을 놓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정찰대 대장 마이렐이 숨을 헐떡이며 복도를 돌아나왔고, 정찰병 두 명이 그 뒤를 따랐다. 그들의 눈은 밝게 빛나고 있었고 두 뺨은 빨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필시 아드레날린과 추위 때문일 터였다. "케일라 영주님, 안전한 곳으로 모시겠습니다," 마이렐이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행렬이 도시를 향해 진을 치고 있습니다."
"뭐라고?" 케일라가 말했다. 처음에는 인부였고, 이제는 행렬이라니. 자르실은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의 스승 중 한 명과 함께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녀는 그를 불러들여야 할 터였다, 그를 가까이에—
"영주님," 마이렐이 케일라의 주의를 환기시키면서 끼어들었다. 그들은 창문 바깥 멀리에 있는 모닥불 쪽을 바라보았다. "라딕과 십여 명의 병사들이 모두 무장하고 성문으로 접근하고 있으며, 제 정찰병들은 행렬이 전투를 위해 무장을 하고 있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도 알고 있는 게로군," 케일라가 말했다. "그들에게 타우노스의 인부들은 똑같은 기계가 아니라고 말해 주어야—"
"영주님, 안 됩니다," 마이렐이 말했다. "저희는 더 높은 층으로 가야 합니다. 정찰병들이 건물 안에 바리케이드들을 치게 해 두었습니다—"
"그들을 보내서 자르실을 찾아 이곳으로 데려오게." 케일라가 말했다. "나는 숨지 않을 걸세, 아직은."
마이렐의 얼굴에 근심이 스쳐지나갔다. 케일라는 손짓을 해 그것을 물렸다.
"이곳은 내 도시네, 대장. 펜레곤이 위협을 받고 있을 때 숨지는 않을 것이야."
마이렐은 두 정찰병에게 고개를 끄덕였고, 그들은 경례를 한 뒤 자르실을 찾기 위해 달려나갔다. 케일라는 그들이 가는 것을 지켜본 뒤, 다시 창가를 향해 몸을 돌렸다.
커 산맥 뒤에서는 지는 해가 따스하게 타오르고 있었고, 펜레곤 외곽에 있는 들판은 검은 옷을 입은 행렬을 숨기는 이른 황혼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케일라가 지켜보는 가운데, 요리용 불들이 깊은 밤의 희미한 별처럼 타오르며 어둠 속에서 점점이 반짝였다.
이 행렬은 펜레곤의 전사들을 수적으로 압도했다. 도시의 병력은 얼마 정도였던가? 정찰병 백 정도에 도시 경비병은 천 명이 채 되지 않았다. 그녀는 징집 명령을 동원할 수 있었지만, 그렇게 되면 훈련받지 않은 사람들이 전장에 서게 될 터였다. 펜레곤의 강점은 고립이었지만, 고립되지 않았을 때에는, 그리고 병력이 도시를 위협할 때에는—
충분했다. 케일라에게 남은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젊었을 때, 그녀는 크룩에서 도망쳐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지금 이때까지도, 그녀의 고향은 폐허인 채였다. 케일라는 펜레곤에서 도망칠 생각이 없었다.
"타우노스, 인부들을 무장시키게," 케일라가 명령했다.
타우노스는 몸을 떨었다. 그것은 그가 얼마나 놀랐는지를 드러내는 작은 움직임이었다. "그렇게 해야만 할 지 모르겠습니다," 그가 말했다.
케일라의 눈은 우르자를 생각나게 하는, 냉정하고 효율적인 강철과 같은 눈빛으로 빛났다. 훌륭하고, 가차없었다.
"나 또한 세계의 종말을 견뎌내고 살아왔네," 케일라가 말했다. "나는 전방에 있지 않았지만, 나도 내가 자네에게 무엇을 부탁하는 것인지 정도는 알고 있네," 케일라는 손을 내밀어 그의 팔을 세게 붙잡았다. 젊었을 때라면, 그와 같은 몸짓은 수많은 불꽃들이 그의 몸을 뚫고 지나가게 했을 터였다. 이제, 그것은 그저 압박일 뿐이었다. "나는 우르자가 아니네," 케일라가 말했다. "펜레곤과 이곳의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그렇게 해 달라고 하는 것이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야."
타우노스도 그녀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올린 뒤 손을 꼭 쥐었다.
"고맙네," 케일라가 말했다. 그녀는 타우노스의 팔에서 손을 떼고 대장에게 몸을 돌렸다. "마이렐?"
"이미 정찰병들을 호출했습니다," 마이렐이 말했다. "그리고 도시 경비병들은 어제부터 경계 태세를 취하고 있는 중입니다."
"민병대를 징집하게," 케일라가 말했다. "무기고를 개방하고, 창을 들어올릴 수 있는 사람은 전부 벽으로 보내게."
"싸움에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겁니다."
"알고 있네," 케일라가 말했다. "하지만 우리에겐 숫자가 필요하네. 전쟁 경험이 있는 사람들을 찾아서 다른 이들을 이끌도록 하게. 다들 자신의 도시를 지키기 위해 싸울 것이야. 가게." 케일라는 그녀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달려가는 마이렐을 향해 고개를 돌리지 않고 창문을 계속 쳐다보았다. 창문에서 몸을 돌리는 것은 끔찍한 새로운 장의 시작을, 구세계의 잔인함을 돌아간다는 것을 의미했다. 펜레곤은 여태까지 몇 년 동안 벽이 필요없었던 연약한 곳이었다. 케일라는 이 일이 지나간 후에는 그것이 그저 구세계에서 벌어졌던 최악의 상황을 상기시켜주며 경고하는 유물에 지나지 않기를 바랬다.
크룩은 아침에 함락되었다. 그 기억은 반갑지 않은 쓰라린 고통과 함께 케일라에게 찾아왔다. 흐릿한 봄의 새벽녘에, 도시에 있는 웅장한 탑들의 회색 유리 위에는 여전히 깨끗한 이슬이 맺혀 있었다. 크룩의 붉은 벽돌 거리는 저녁에 내린 비 때문에 여전히 축축했고 아침의 더위에 겨우 김이 나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녀는 아들을 임신한 채로 도시에서 도망쳤다. 타우노스도 그곳에 있었다; 그는 그녀의 백성이 죽어 가는 동안 그녀를 보호하며 함께 도망쳤다.
케일라는 창문에서 몸을 돌렸다. "세상이 거의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 실망스럽군," 그녀는 타우노스에게 말했다. "지금쯤은 교훈을 얻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이네."
타우노스는 자신의 일지를 쳐다보던 시선을 들어올렸다. 그는 인부들을 무장하는 데 필요한 알림, 순서, 아이디어들과 같은 단계들을 메모하고 있었다. 그는 얼굴을 찌푸리며 눈썹에 깊은 주름을 만들어냈다. "외람되지만," 그가 말했다, "사람이 있는 한, 세상은 진정으로 변하는 법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자네가 틀렸기를 바라지," 케일라가 말했다. "얼마나 빠르게 인부들에게 펜레곤을 방어할 준비를 시킬 수 있겠는가?"
"기능공들에게 작업을 지시할 한 시간만 주십시오," 타우노스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케일라가 이전에 들어 본 적이 없을 정도로 떨리고 있었다. "인부들에게 적용하는 일은 간단합니다. 저녁 전에 수십 개, 아침까지는 백 개를 준비할 수 있습니다." 그는 마치 질긴 고기를 씹는 사람과 같이 해야 할 일을 끝까지 견뎌 내는 사람처럼 말을 했다.
"좋아," 케일라가 말했다. "그런 뒤에는 저들을 바다 속으로 행진시키는 게지, 안 그런가?"
잠시 시간이 흘렀지만, 타우노스는 케일라가 자신에게 농담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미소를 지었고, 케일라는 웃었다. 짧고 날카롭게. 긴장되지만, 진심으로. 작별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인 뒤, 타우노스는 서둘러서 작업장으로 향했다.
"당신은 기계 악마들을 숨겨 주고 있다," 케일라가 쇠창살문에서 모습을 드러내자 라딕은 그녀를 향해 소리쳤다. 안장의 뿔 위로 몸을 숙이고, 입은 완전히 다물지 못한 채, 지는 해를 어깨 너머로 등진 라딕의 모습은 동물적인 실루엣을 떠올리게 했다. 그의 자세는 케일라에게 몇몇 육식성 고양잇과 동물들이 취하는 나른한 느긋하지만 치명적인 자세를 상기시켜 주었다. 그의 목소리는 단검의 칼날처럼 차가웠고, 이번에는, 검은 갑옷을 입은 기수 열 명이 그의 옆에 늘어서 있었다.
"우리의 경건한 신자들이 기계들을 몰아내려고 했을 때, 당신의 경비병들이 그들을 죽였다," 라딕은 이빨 사이로 쉭쉭대는 소리를 냈다. "그들의 아이들이 우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아니면 울음 소리가 도시의 지옥석이 웅웅대는 소리에 파묻혀 들리지 않게 된 것인가?"
지옥석? 가로등이겠지, 하고 케일라는 생각했다. 지난 겨울, 타우노스는 그의 기능공들을 보내 부서진 마법석 조각들을 공공장소의 횃불에 설치하게 했고, 덕분에 겨울 폭풍의 가장 혹독한 상황 속에서도 펜레곤은 어둠 속에서 계속 빛을 밝힐 수 있었다. 도시의 조용한 구석으로 가면, 그것들이 웅웅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섬뜩하고 따끔한 깨달음이 케일라의 등 뒤로 기어올라왔다.
케일라는 탈의 검은 깃발이 도시에서 휘날리는 것을 본 적이 없었고, 거리 설교자들이 태양 신의 경전을 찬양하는 것도 들어 본 적이 없었지만, 그녀가 모든 곳에 있을 수 있던 것은 아니었다. "자네의 사람들이 펜레곤 안에 얼마나 오래 있었던 거지?" 케일라가 물었다.
"이 도시를 구할 수 없다는 것을 알 정도로는 충분히 오래 있었지," 라딕이 말했다. "많은 신자들이 수 년 전에 간절히 피난처를 찾아 이곳에 도착했지. 당신이라면 그 누구보다도 기계의 위험을 잘 알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그들은 당신이 수호 장관의 하수인 중 한 명을 당신의 평의회에 들이는 것을, 당신의 기능공들이 더 많은 기계들에 생명을 불어넣기 노력하는 것을, 그리고 그들이 펜레곤의 기계 악마들이 자신들의 명령에 복종하도록 훈련시키는 것을 공포에 질려 지켜보았다. 신자들은 험난한 길을 헤치고 와서 펜레곤이 뉘우치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었다," 라딕이 으르렁댔다. "당신과 당신의 백성은 바보들이다. 당신은 살인자 우르자와 미쉬라가 그랬던 것과 똑같이 새로운 벽을 쌓아올리고 이 대지를 죽이고 있다. 케일라 영주, 한번 말해 봐라. 어째서 구세계를 죽인 바로 그 물건에 그렇게 집착하는 건가?"
"우리가 가진 인부들은 그런 기계들이 아니네," 케일라가 말했다. "우르자와 미쉬라의 작업물들은 그들이 죽었을 때 죽었네. 우리가 만드는 것은—"
"새로운 세계를 위한 새로운 악마들이지," 라딕이 그녀의 말을 일축하면서 말했다. 그는 그녀 너머로 펜레곤을 노려보았다. "우리는 이 도시를 구할 수 없다," 그가 말했다.
"우리는 자네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네," 케일라가 말했다. "우리는 자네가 요청한 대로 탑으로 가는 여정에 필요한 보급품을 제공했고, 긴 여행을 한 자네의 백성을 도왔지만, 이제 자네들은 이곳을 떠나야만 하네. 펜레곤에게는 자네들이 필요하지 않고, 우리는 싸움을 원하는 것도 아니네. 우리를 내버려두게."
"저들을 몰아내라," 라딕은 그녀를 무시했다. 그는 성벽을 향해 소리를 지르며 그곳의 경비병들과 긴장한 민병대를 바라보았다. "기계 악마들을 바다 속으로 몰아넣어라," 그가 말했다. "바닥에 엎드려 탈의 용서를 구해라. 백색 탑으로 진군해 벽돌 하나도 남기지 말고 전부 부숴라. 날이 밝으면, 펜레곤도 그와 똑같은 모습으로 만들 것이다."
마이렐이 검을 뽑기 시작했지만, 케일라가 손을 치켜들었다. 마이렐은 라딕을 노려보면서 검을 다시 칼집에 집어넣었다.
"펜리곤의 시민들은 들어라," 라딕이 소리쳤다. "너희들은 우리의 적이 아니다. 기계 악마들이 침을 뱉고 저주하는 자들, 기계가 없는 세상은 상상할 수도 없는 지도자를 거부하는 자들, 너희들은 우리의 동료가 될 것이다." 그는 자신의 동료 중 한 명을 향해 손을 내밀었고, 그는 그에게 창을 건네주었다. "기계와 마법의 시대는 죽었다," 라딕은 머리 위로 창을 치켜들면서 말했다. "선택해라! 함께 죽던가 우리와 같이 살던가!"
이번에는 마이렐이 검을 완전히 뽑아들었지만, 라딕은 공격하지 않았다. 대신, 라딕은 자신과 케일라 사이에 있는 자갈들 위로 창을 던졌다. 그것은 날아가 튕겨져 그녀의 발 앞에서 멈춰섰다.
"새벽까지," 라딕이 말했다. "당신이 결정해라, 케일라 영주." 그는 자신이 탄 말을 빙글 돌린 뒤 기수들을 향해 휘파람을 불었다. 그들은 함께 말에 박차를 가해 자신들의 진영을 향해 나아갔다.
"궁수들에게 화살을 쏘라고 명령할까요?" 마이렐이 물었다.
차가운 바람이 펜레곤으로 통하는 자갈길을 훑고 지나갔다. 도시 앞에 펼쳐져 있는 들판은 봄이 시작될 때에는 매우 활기찼지만, 이제는 진흙투성이로 황폐해져 있었다. 탈 교도들의 행렬이 이루고 있는 어두운 강물이 그 위로 퍼진 채로, 그들의 모닥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커 산맥은 희끄무레하고 삭막하게 어렴풋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것은 세계의 종말이었다. 마법공학과 기계 시대의 종말이었다. 새벽이 오면, 새로운 시대가 테리시아에 펼쳐질 터였다.
"화살을 아끼게," 케일라가 말했다. "내일 필요할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