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 피렉시아 공습 | 에피소드 4: 불가능한 역경
엘스페스는 코쓰와 맞추기 위해 속도를 냈고, 둘은 사방에 잔해가 뿌려진 플랫폼에서 가능한 한 빨리 움직였다. 나히리의 희생 덕분에 그들은 목표에 더 가까이 다가갔다. 또한 그들의 속도는 카야를 제외하고 상당히 느려졌다. 잔해에 걸려 넘어지면 계층의 깊은 곳으로 추락하기 때문이었다.
훼손되지 않은 하늘에 뚫린 구멍은 아직 그대로 있었고, 도자기처럼 완벽한 이 차원에 난 들쭉날쭉한 상처는 피렉시아의 모든 색을 빨아들이는 듯이 보였다. 그들은 서둘러 전쟁 속을 지나갔다. 어느 누구도 그들이 그 참혹함에 동요되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관심을 끌기에 그들은 너무 작았다.
악의에 찬 엘스페스는 고개를 들어 전사들을 쏘아보았다. 기다려라, 그녀의 마음속에는 분노가 들끓었다. 우리에게 한 짓을 후회하게 만들어 주지.
그들은 후회하지 않을 터였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모든 일이 잘 풀린다고 해도, 이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불가능에 가까운 승리를 쟁취한다고 해도, 피렉시아가 미로딘을 파괴한 것을 후회할 리는 없었다. 그들은 후회가 무엇인지 모르는 자들이었다. 피렉시아는 대의와 피렉시아의 영광을 위해 움직였고, 결국 그것이 전부가 되었다. 모두 하나가 되거나, 그렇지 않으면 전멸할 것이다.
그들이 도착한 땅에 있는 높은 다리는 너무 약해서 시올드레드의 콜로세움의 무거운 조각을 견딜 수 없었다. 일반적으로 다리가 충분히 튼튼했더라도, 그들이 도착했을 때 나히리의 희생으로 끝없는 백색 심연 속으로 곤두박질쳤기 때문에 많은 하중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 가장자리 너머를 쳐다보던 엘스페스는 생각했던 것보다 계층 아래 더 깊은 곳까지 볼 수 있었다. 그들을 둘러싼 순백색 플랫폼의 모든 공간은 격자로 나누어져 진홍색 힘줄 같은 긴 다리로 연결되어 있다.
찌꺼기 채취장의 변질된 사령용액 폐기물이 있는 이곳에서, 엘스페스는 깨끗해야 했던 것을 더럽힌 것이, 테로스의 하얀 모래 위에 뿌려진 피가 생각났다. 코쓰, 멜리라, 고블린 기술자들은 타고난 미란이었다. 플레인즈워커들은 이곳이 낯설었지만, 이곳은 미로딘이었다. 피렉시아의 차원이 아니라 그들의 차원이었다. 번들거리는 기름이 이곳을 바꾸어 놓았다고 해도 말이다. 그들은 자신의 고향에서 바깥을 내다보지 말았어야 했다.
격자 구조 플랫폼에서 높이 솟은 건물들은 유기적 형태의 조각품 같았다. 마치 금속의 기계적 속성에 매끈한 곡선에 뼈와 힘줄의 유기적 속성을 섞어놓은 듯했다. 모든 것이 빨간색과 하얀색의 대비였다. 차원 전체가 엘레쉬 노른의 이미지를 본떠 만들어져, 끔찍한 꿈속에 있는 것 같았다.
모든 다리는 피렉시아 대중들의 통로로 이용되도록 설계되었기 때문에, 플레인즈워커들 외에는 아무도 이용하는 이가 없었다. 그들 위에서 벌어지는 전투는 너무 멀어서 메아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그들 또한 혼자일지도 몰랐다. 대신 희미하게 들려오는 노래 소리가 주변을 가득 채웠다. 마치 그 구조물이 노래하는 듯했다. 피렉시아의 공포 찬가였다.
"나히리는 우리를 위해 엄청난 희생을 했어," 코쓰가 말했다. "나히리를 위해서라도 그녀가 시작한 일을 우리가 마무리해야 해."
"나히리는 감염되었어," 엘스페스가 말했다. "그 일이 있기 전에 나히리 안에서 무언가 변화가 일어나는 걸 봤어. 그녀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몰랐던 게 틀림없어.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
"나히리가 제게 말했어요," 멜리라가 걸음을 재촉해 바짝 다가오며 말했다. "우리가 용광로로 돌아가면 자기를 돕겠냐고 묻더군요."
"도왔을 거야?" 엘스페스가 물었다.
"그럼요," 멜리라는 대답한 후 깊은 한숨을 쉬었다. "도왔겠죠. 그런데 피렉시아화가 진행되는 걸 뒤집는 건 비옥한 토양에서 가시나무를 뽑는 것과 같아요. 가시나무 백 그루에 도전하는 거죠. 하나를 파내고 나면 백 개가 보여요. 피해를 입은 그녀의 몸을 회복하려면 며칠 동안은 꼼짝없이 누워 있어야 했을 거에요. 뒤처져야 했단 말이죠."
"그녀는 그걸 시간 낭비라고 생각했겠지," 엘스페스가 말했다.
그들은 이야기를 나누며 카야를 겨우 따라잡았다. 가만히 듣고 있던 카야는 그들을 쳐다보더니 이렇게 물었다, "그럼 혹시 제이스도 회복시킬 수 있어?"
"그가 허락한다면요," 멜리라가 말했다.
카야는 가방 안에 든 성배를 엉덩이로 튕기며 걷고 있는 제이스 쪽을 돌아보았다. 제이스의 팔에 난 상처가 변형되어 와이어와 밝은 금속이 화상으로 인해 반짝거렸다. 남아 있는 살이 축축한 상태로 섬유질 케이블로 변하면서 검어졌다.
"제이스가 허락할 것 같진 않지만요," 멜리라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생각보다 나를 잘 아는군," 그녀의 머리 속에 제이스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다른 이들에 비해 정신술 경험이 적은 멜리라는 놀란 듯 보였다. "내 미래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내가 듣고 있지 않을 거라고 진짜 생각했어? 우리를 위험에 빠뜨리면서까지 내 생명을 구하고 싶진 않아. 브라스카를 잃었으니 지금은 더더욱 안 돼. 내가 감당할 수 없어."
"아직 우리와 함께 있어줘서 고마워, 제이스," 카야가 말했다.
"당분간은," 제이스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의 모든 에너지가 앞으로 향하더니 그의 목소리가 다시 사라졌다.
"우린 나히리의 이야기와 그녀가 쓴 결말을 존중해. 이 일을 승리로 끝내서 말이야," 카이토 옆에서 걷고 있던 타이바르가 말했다. "위대한 희생에는 위대한 이야기가 필요하지."
"난 그녀가 죽기를 바랐어," 카이토가 말했다.
깜짝 놀란 엘스페스는 뒤를 돌아 그를 쳐다보았다. "그게 무슨 뜻이야?" 그녀가 말했다.
멀쑥한 플레인즈워커 카이토가 어깨를 으쓱하자 어깨에 앉은 너구리가 털썩거렸다. "나히리가 우리 중에 가장 강했다는 건 인정해야 해."
"그래," 엘스페스가 천천히 대답했다.
"나히리는 너무 오래 여행을 했고 아마 우리 중 아무도 그녀를 멈출 수 없었을 거야," 카이토가 말을 이었다. "두 명이 힘을 합쳐도 그렇게 하지 못했겠지. 그런데 일대일로 그런 원시적인 힘을? 나라면 쓰러질 거야. 너도 마찬가지고. 난 전장에서 나히리를 상대로 싸우고 싶지 않아. 그녀는 자신을 구할 수 있는 한 사람과 자신을 분리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우리가 계속 움직일 수 있도록 했어. 중간에 잡혀서 그녀가 지키려던 사람들에게 등을 돌리지 않고 그 희생을 끝까지 완수했으면 좋겠어."
"때로는 동료와 싸우는 것보다 동료를 슬프게 하는 게 더 나을 때가 있네," 이번에는 타이바르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사실이었지만, 엘스페스는 심란해져서 더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들은 잔해 속에서 시체를 찾을 수 없었다. 그들을 위해 희생했지만, 나히리는 변화된 형태로, 무한한 에너지를 가진 적으로 돌아올 수도 있었다.
"끔찍하네," 카야가 말했다. "알려 줘서 고마워."
"여긴 예쁜 환상과 어울리는 장소와는 거리가 멀어." 카이토가 어깨를 으쓱했다. "우리가 무언가를 원래의 모습으로 볼 수 없다면 우리는 상처만 입게 될 뿐이야."
"어, 저게 도대체 뭐야?" 카야가 길 한가운데 멈춰 서서 입을 벌린 채 저 아래에서 다가오는 거대한 거상을 바라보며 물었다.
머리는 흰색 금속으로 뒤집힌 눈물 모양이었고, 가운데는 텅 빈 붉은 소켓 하나로 나뉘어 있었다. 마치 훨씬 더 큰 존재가 와서 눈을 뽑아간 것 같았다. 그 몸의 형태는 구부정하고 길쭉해서 다른 일반적인 생명체의 몸 형태와 비교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다. 곤충도, 파충류도, 휴머노이드도 아니었고 다른 계획에 따라 지어진 것이었다. 모두 빨간색과 흰색으로만 이루어져 있어서 주변 풍경과 거의 완벽하게 어울렸다. 카야가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엘스페스는 또 다른 기념비적인 건물로 주의를 끌었다.
"엘레쉬 노른은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되면 포기하지 않지," 코쓰가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녀는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것들, 즉 자기를 가장 잘 섬기고 자기를 위해 가장 격렬하게 싸우는 자들을 뼈로 만들었어. 뼈로 바꿔서 페어 바실리카에 추가했지." 그는 조각상을 가리켰다. "아직 경계를 낮춰선 안 돼. 미란이 가까이 다가오면 이런 구조물들이 갑자기 움직여서 미란을 죽이는 걸 봤어."
이것은 조각상일 수도 있었고, 그들이 가까이 오면 공격하는 피렉시아인이 될 수도 있었다. 다리를 따라 놓인 그것의 위치가 기분 나쁠 정도로 위협적이었다. 엘스페스는 얼굴을 찡그리며 칼자루를 쥐었다.
"좀 더 안전한 다리로 갈까?" 카이토가 물었다.
"엘레쉬 노른의 제단에 가려면 여기밖에 없어," 코쓰가 말했다. "저기부터 미코신스 정원에 들어갈 수 있어. 거기서 씨앗핵에 접근할 수 있고 엘레쉬 노른이 거기에 차원파괴자를 심었지. 그곳이 우리의 목적지야."
"난 아직도 엘레쉬 노른이 어떻게 가짜 세계수를 심을 수 있었는지 이해가 안 되는군," 타이바르가 말했다. 페어 바실리카의 공간이 그의 평소 목소리 울림을 흡수하는 바람에 그의 목소리가 작게 들렸다.
여기에서는 그들의 모든 것이 작아졌다. 피렉시아의 존재 앞에서 그들은 작아졌다.
타이바르가 말을 이었다. "세계수는 우주 안에서 스스로 자라 칼드하임의 영역을 연결하지. 현실의 안과 밖 양쪽에 존재해. 누군가가 어떻게든 그 씨앗을 훔쳤다고 해도, 싹이 나면서 이 차원을 둘로 쪼개야 했어.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나지 않은 것은 기적이자 공포야."
"그런 건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코쓰가 말했다. "본 사람이 거의 없지. 우리 중에는 멜리라가 그 나무까지 갔다가 돌아온 유일한 스파이야."
"그건 그들이 나를 감염시킬 수 없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거에요," 멜리라가 말했다. "저와 함께 정원에 들어갔다가 다시 나올 만큼 오래 살아남은 사람들은 전부 우리가 집에 도착하기 전에 쓰러졌어요. 노른의 나무는 카른이 갇혀 있는 씨앗핵 아래에 심겨 있죠. 그 나무는 정말 끔찍해요. 타이바르 말이 맞아요. 그걸 보면, 그 나무가 차원을 두 개로 나눠 버리겠다고 생각하게 돼요. 그 뿌리는 아주 깊고 가지는 미코신스 정원을 뚫을 기세로 높이 솟아 있어요." 그녀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 나무를 계속 쳐다보다 보면 물속을 들여다보는 것 같아요. 가지는 우스꽝스럽게 뒤틀려 있고 뭔가 정상적이지 않죠."
"오멘패스," 타이바르가 말했다. "왠지 모르지만, 그녀는 자격이 없는 나무의 가지에 오멘패스를 생성하고 있어." 그는 허공을 노려보다가, 옆에서 아무 미동도 없는 기분 나쁜 거인을 쏘아보았다. "우리가 그걸 끝내야 해."
"그게 우리가 여기에 온 목적이지," 카야가 말했다. 그녀는 코쓰를 쳐다보았다. "계속 갈까?"
"공격할 테면 하라지," 그는 말했다. "엘레쉬 노른의 제단에 가까이 왔어." 그는 다른 건물들에 비해 크고 장식이 화려한 건물 하나를 가리켰다. 요새처럼 하늘을 향해 뻗은 그 건물은 흰색과 피처럼 빨간색으로 번쩍였고 유기적이면서도 기계적인 느낌이 났다. 특유의 엄격하고 금욕적인 분위기를 내는 아름다움이었다. 피렉시아 연합의 기념물이었다.
엘스페스는 그걸 너무 오래 쳐다봤다가는 시력을 잃을 것 같았다. 검을 쥔 손에 힘을 꽉 주며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 가자."
그들은 계속 걸어갔다. 다리에서 출발했을 때보다 지금 그들의 마음이 더 하나로 뭉쳐졌다. 카야는 여전히 제이스를 피해 반대쪽에서 걸었다. 제이스가 어떤 말로 카야로부터 성배를 받았는지는 모르지만, 그녀는 더 이상 그를 노골적으로 노려보지 않았다.
골리앗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들은 그 공허한 시선 아래를 순순히 지나쳐 다리 끝에 있는 건물들을 향해 이동했다. 카야는 무리의 선두에서 잔해들을 둘러 가지 않고 그 사이로 지나갔다. 그녀가 지나간 곳마다 보라색 에너지가 얼룩처럼 조금씩 묻어났다.
코쓰, 엘스페스, 미란들이 뒤따랐고 카이토는 한두 걸음 뒤처져 있었다. 그다음은 타이바르가, 마지막은 성배를 지닌 제이스가 따라갔다. 타이바르는 그를 계속 쳐다보다가 입을 뗐다, "빨리 오게, 제이스." 우린 자네를 지금 잃고 싶지 않으니."
"나도 나를 잃고 싶지 않아," 제이스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어두운 유머가 녹아 있었다. "나 없이는 다차원을 구할 수 없어."
제단의 문은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비현실적인 짐승의 아가리처럼 활짝 열려 있었다. 정적인 건물과 굳어버린 시체를 보니 생명과 죽음 사이 어디쯤 멈춰 있는 듯했다. 그걸 보고 있자니 엘스페스의 팔 위로 벌레가 기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그들은 장애물에 대해 서로 경고하고 대비하며 텅 빈 로비 속을 계속해서 걸어갔다.
"우리가 지금 함정 속을 걷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드는군," 타이바르가 속삭였다. 그 공간에 대한 경외심보다는 주의를 끌지 않으려는 현실적인 바람에 더 가까웠다. 얼어붙은 피렉시아인들이 벽에 박혀 있었다. 엘레쉬 노른이 가장 좋아하는 대상이었다.
"실제로 함정에 빠졌을지도 모르지," 카야가 말했다. "처음엔 뿔뿔이 흩어졌었는데 제이스를 찾아 소리 지를 수 있을 만큼의 힘만 남아 있는 브라스카를 발견했잖아? 그들은 아자니 덕분에 우리의 공격 계획을 예측했을 수 있어. 그는 우리를 너무 잘 알아. 네가 계속 언급하는 이 엘레쉬 노른이라는 자는 아자니를 이용해서 우리를 곤경에 빠뜨릴 만큼 똑똑한 모양이네."
"똑똑하죠. 하지만 모든 걸 알지는 못해요," 멜리라가 말했다. "반란군으로 그녀의 군대의 눈을 돌릴 수 있어요. 우리는 계속 가야 해요."
그들은 미동이 없는 시체들로 만들어진 기둥을 지나 조용한 건물 깊숙이 들어갔다. 담쟁이덩굴같이 벽을 덮은 힘줄에서 진물이 흐르고 무시무시한 사람처럼 생긴 이빨들이 마치 자랑이라도 하듯 일렬로 늘어서 있었다. 그 외에도 피렉시아의 악몽 같은 광경이 수없이 펼쳐졌다. 페어 바실리카는 끝이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기에, 그들은 그걸 모두 보게 될 것이다.
페어 바실리카에서 미코신스 정원까지 이어지는 하강 나선 계단은 엘레쉬 노른의 왕좌 아래에 있는 방을 통해 갈 수 있다. 그곳 역시 지키는 자가 없었다. 함정으로 들어가고 있다는 느낌이 커지자 플레인즈워커들은 똘똘 뭉쳤다. 타이바르는 자신의 반짝공허 금속 조각을 만지작거리며 자신의 몸을 더 단단하고 탄력적인 물질로 전환해야 하는 시점이 오기를 기다렸다. 필요한 순간이 올 때까지 마법을 사용하지 않는 것은 예상했던 것보다 힘들었다. 그는 이곳에 온 순간부터 지금까지 줄곧 자신을 무장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들은 끔찍한 적에게 맞서 싸우기 위해 모인 위대한 영웅들의 동맹이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이야기가 자신을 그들의 편으로 이끌었다는 사실에 몹시 기뻤다. 그 이야기에서는 많이 잃을수록 큰 승리가 따랐다. 그러나 지금은 자신을 짓누르는 피렉시아와 미래에 대한 염려로 인해 기억을 떠올리기가 어려웠다.
계단의 바닥층은 반짝이는 파란색 금속 플랫폼으로, 페어 바실리카의 작은 조각이 아래의 구 쪽으로 확장된 것이었다. 아래쪽으로 내려가는 계단은 그들 뒤쪽으로 저 멀리 천장까지 이어져 막혀 있는 기둥이었다.
페어 바실리카에 가까운 그 기둥의 위쪽 반은 백금속이었다. 땅에 가까워질수록 기둥은 철과 같은 푸른 회색으로 변해갔고 질감이 자갈처럼 이상해졌다. 카야는 눈을 깜빡이며 벽을 만지려는 듯 손을 뻗었다.
"안 돼요," 멜리라가 거칠게 말했다. 카야는 깜짝 놀라 그녀를 쳐다보더니 손을 다시 내렸다. 멜리라는 안도의 한숨을 살짝 내쉬고는 설명했다, "그건 미코신스에요. "저게 피렉시아가 맨 처음 우리를 이긴 방법이죠. 미로딘의 심장부에 침입해서 우리가 있는 모든 곳으로 감염성 포자를 하나씩 하나씩 보냈어요."
카야는 벽을 다시 흘끗 보더니 코쓰와 폭발물 팀에 바짝 붙었다. "그렇구나," 그녀가 말했다.
"멜리라, 정말 미안한데 나무가 안 보이네," 타이바르가 말했다.
제이스가 신음했다.
모두가 몸을 돌려 배를 안고 웅크려 있는 제이스를 쳐다보았다. 그의 뱃속에서 꿈틀거리는 금속 ‘정맥'이 신체 조직을 지배하기 위해 싸우면서 피부가 더 심하게 갈라졌다. 겨우 몸을 일으킨 그의 파란 눈은 희미하게 반짝였고 그의 목소리가 그들 머릿속에 울렸다.
"멜리라는 씨앗핵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어. 더 깊숙이 들어가야 해."
"더 깊숙이," 코쓰가 말했다. "그래. 엘레쉬 노른이 씨앗핵에 접근하지 못하게 막고 있어."
"하지만 아직 방법이 있어요," 멜리라가 말했다. "엘레쉬 노른은 이 친구처럼 단단한 물체를 통과할 수 없어요." 그는 카야를 향해 엄지를 치켜들었다. "일단은 문 쪽으로 가야 해요. 그리고 그걸 통과하는 거에요."
플레인즈워커들은 섬세한 미코신스 기둥과 금속으로 장식된 풍경을 둘러보았지만 뒤쪽에 있는 구조물 외에 다른 것은 보이지 않았다.
"어디야?" 엘스페스가 물었다.
"이쪽이에요," 멜리라가 대답하고 나서 거친 땅을 가로질러 출발했다.
나머지 일행은 미코신스 기둥을 조심스럽게 피하며 서로 놀래키지 않으려고 바짝 붙어서 그녀를 따라갔다. 그녀가 일행을 이끌고 도착한 곳에는 곰팡이 가닥이 뒤틀린 채 겹겹이 쌓여 있었는데, 마치 이곳에서 거대한 짐승의 내장을 도려낸 것 같았다.
그 무더기를 가리키며 멜리라가 말했다, "씨앗핵으로 가는 문이에요." 거기에 닿는 모든 것을 감염시키죠. 엘레쉬 노른은 이것을 통과할 만큼 강한 미란이라면 완벽함의 영광을 차지할 만하다고 판단한 모양이이에요. 다행히도 저는 피렉시아화에 면역이 있어요. 번들거리는 기름이 묻어도 금방 지워지죠."
그녀가 그 무더기에 가까이 다가가자 그것이 들썩거리고 요동치더니, 물결치는 내장이 원형을 이루어 무시무시한 어둠으로 이어지는 구멍이 열렸다. 괴물 아네모네로 가장한 입구였다. 내장이 다가와 그녀를 어루만지는 듯하더니 번들거리는 기름을 묻혔다. 그녀는 기름을 닦아내고 뒤를 돌아 나머지 일행을 바라보았다.
코쓰가 인상을 찌푸렸다. "우리는 멜리라와 같은 보호 기능이 없어. 땅을 날려버려야 할 거야."
"왜 그렇게 해야 하지? 그러면 우리가 가진 은폐를 잃을 텐데," 카이토가 말했다. "다른 방법은 없을까?
"한 가지 방법이 떠올랐네," 타이바르가 말했다. 그는 반짝공허 금속 조각을 들어 올렸다. "콜로세움에서 내 피부에 묻은 피렉시아 기름이 안으로 스며들기 전에 카이토가 그걸 제거해 줬지. 카이토가 그 기름을 재빨리 닦아줄 수 있다면 내 마법을 사용해서 우리가 씨앗핵을 통과할 수 있을 걸세. 아주 빨리 진행되어야 하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변환하는 마법은 나도 오래 유지하기 어려우니. 하지만 카이토가 역할을 하는 동안은 보호해 줄 수 있을 거라네."
"가능해. 하지만 이 녀석이 내 염력에 저항이 생겨서 강한 두통을 일으킬 거야," 카이토가 제자리를 왔다 갔다 하며 말했다.
멜리라가 이마를 찌푸렸다. "해볼 만은 하겠네요," 그녀가 말했다. "어떻게 하면 돼죠?"
"잠깐만," 타이바르가 말했다. "내가 너희에게 마법을 쓰는 동안 아무도 자신의 마법을 쓸 수 없어. 그리고 그건 우리가 아주 빨리 움직여야 가능한 거고."
카이토는 놀란 표정이었다. "내 마법을 못 쓰면 기름을 어떻게 닦지?"
"아까 가져온 헤일로로 잠깐 동안 너를 보호할 수 있어," 코쓰가 말했다. "그 정도는 버텨줄 수 있지."
카이토는 고개를 끄덕였고 일행은 타이바르를 중심으로 모였다. 타이바르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초록색 식물의 냄새가 미코신스의 기름진 곰팡이 냄새를 뚫고 그들 주위를 휘저었다. 일행 중 카야만이 그것이 칼드하임의 냄새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금속이 타이바르의 피부 전체를 뒤덮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천천히 진행되다가 점점 빨라져서 그의 몸이 반짝공허 금속 조각이 되었다.
금속은 계속 퍼져서 너무도 쉽게 그들 모두를 뒤덮었다. 완전히 변신하지 않은 건 제이스뿐이었다. 마치 피렉시아가 그를 잠시라도 놓아주기 싫다는 듯, 그의 팔에 난 상처가 그 과정을 막는 것 같았다.
그 과정이 모두 끝나자, 타이바르가 그의 손을 잡고 말했다, "움직이자."
그들은 한 몸처럼 똘똘 뭉쳐 내장 덩어리를 향해 나아갔다. 내장은 그들의 단단해진 피부를 쓸고 지나가며 기름을 묻혔지만 공격하지는 않았다. 그들 앞에 좁은 복도가 펼쳐졌다. 그 끝에는 뻥 뚫린 연결 통로가 있어 하나의 다리처럼 보이는 것으로 이어졌다. 그들은 타이바르의 마법이 끝나기 전에 서둘러 복도를 닦았다.
마침내 그들이 이른 곳은 그들이 익숙해진 끔찍한 피렉시아의 풍경은 아니었다. 생동감 있고, 살아 있는 듯하며, 계속 자라나서 오히려 더 끔찍한 곳이었다. 타이바르는 카이토를 쳐다보았다. 카이토가 고개를 끄덕이자 타이바르는 마법을 해제했다.
반짝공허 금속이 녹아 사라졌고 모두의 피부가 기름으로 다시 번들거렸다. 카이토가 어깨를 돌리자 그들의 몸에서 기름이 공중으로 떠오르더니 공처럼 뭉쳐져서 다리 가장자리 쪽으로 날아갔다.
"고마워," 카야가 말했다. "타이바르, 멋진 쇼였어. 타이바르?"
타이바르는 반응이 없었다. 그는 얼굴이 하얘져서 깜짝 놀란 눈으로 먼 곳을 응시하면서 다리 쪽으로 걸어갔다.
카야가 몸을 돌려 피렉시아의 세계수를 쳐다보았다. 차원파괴자였다.
엘레쉬 노른이 키우고, 영양을 공급하고, 타락시킨 것이 분명했다. 그 껍질은 그들이 위에서 본 백자 금속으로 만들어졌고, 성장하면서 생긴 표면의 균열 사이로 선명하고 눈이 아플 정도로 빨간빛이 흘러나왔다. 나무에서는 수액 대신 번들거리는 기름이 흘러나왔고 이상한 그림자가 표면을 따라 움직였다. 혼란스러워진 카야는 눈길을 멀리 돌렸다. 그 비현실적인 나무의 가장 높은 가지 부근에는 길쭉한 하얀색 사각형이 공중에 걸려 있었다. 그들이 공허한 우주에 가까이 갈수록 일부분이 희미해져 거리가 왜곡되어 보였다.
"침공선이야," 코쓰가 비장하게 말했다. "거의 완성됐어."
"이건 칼드하임의 영혼을 왜곡했네," 타이바르가 말했다. "이게 사악하리란 건 알고 있었지만, 이건
분위기가 이상하리만치 고요해서 마치 온 영역이 숨을 거두어간 것 같았다. 나무 위로 높게 뻗은 가지 끝에서 나오는 눈부신 하얀 빛이 번쩍하며 터져 나와 하늘 끝 경계선에 무시무시하게 펼쳐진 대칭성 격자 속으로 퍼져가고 있었다.
"서둘러야 해," 제이스가 말했다.
그들은 달리기 시작했다. 정원과 뉴 피렉시아의 핵심부를 연결하는 다리는 끝없는 낭떠러지 위에 놓인 얇은 선 같았다. 다리의 반대쪽은 나무의 복잡한 뿌리로 이어지는 어두컴컴한 개방 통로였다. 플레인즈워커들이 거의 도착하자 하늘이 또다시 번쩍했다. 이번에는 마치 하늘에서 태양이 폭발한 것처럼 더욱 환했다.
엄청난 폭발과 함께 반짝이는 무지개가 하늘을 채우고 공허한 우주의 믿을 수 없도록 환한 빛이 뒤따랐다. 제이스는 신음했다. 엘스페스는 비틀거렸지만, 코쓰가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잡고 허리를 잡아당긴 덕분에 다리의 옆으로 살짝 비켜갔을 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카야는 가만히 위를 쳐다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린 너무 늦었어," 그녀가 말했다.
"카야," 카이토가 말했다.
그녀는 뒤를 돌아 그를 쳐다보았다. "아무런 소용이 없었어," 그녀의 감정이 갑자기 폭발했다. "세계수는 다차원에 연결되어 있었어. 엘레쉬 노른이 공허한 우주에 접근할 수 있다고. 우린 실패했어."
"나는 칼드하임의 심장이 다차원을 파괴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걸세," 타이바르가 말했다. "우리에겐 아직 최선을 다해 막을 기회가 있다네."
"서두르자," 제이스가 숨도 쉬지 않고 말했다. "빨리 가야 해." 그는 몇 걸음도 못 간 채 비틀거리더니 곧장 바닥으로 쓰러졌다.
"타이바르," 코쓰가 말했다.
반짝공허를 만지작거리며 금속에 잔물결을 일으키던 타이바르는 고개를 끄덕였고 제이스에게 다가가 그를 팔로 들어 올렸다. 일행은 어두컴컴한 입구를 향해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나무의 구멍으로 들어가니 마치 뿌리로 뜨개질을 한 듯 거대하고 둥근 공간이 펼쳐졌다. 방에서 캄캄한 통로가 여러 갈래로 나뉘었다. 가장 큰 통로는 주요 연결부로 이어지는 모양이었다. 그 공간의 중심에 있는 낮은 연단 위에는 카른이 있었다.
거대한 은 골렘이 해부된 채 열려서 플랫폼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었다. 무엇보다 끔찍하게도, 그들의 발자국 소리가 들리자 그가 고개를 돌려 꺽꺽거렸다, "당신들은 여기에 오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이곳은 당신들이 올 장소가 아닙니다."
"카른!" 코쓰와 엘스페스가 그를 향해 달려와 그를 잡았으나 그 피해를 보고 깜짝 놀라 그대로 멈췄다.
"그들이 무슨 짓을 한 거야?" 엘스페스가 물었다.
"뻔하지요. 그들은 기계들의 아버지를 거역했습니다." 카른은 머리를 흔들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움직임은 그게 전부인 것 같았다. "서두르십시오. 침략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몇몇 차원이라도 구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다만
"하나 더 있잖아," 엘스페스가 말했다. "아직 기회가 있어."
카른은 멈춰서 생각에 잠겼다. "그 근원을 찾아서 폭발시켜야 합니다."
"하지만—" 멜리라가 입을 뗐지만 코쓰의 날카로운 눈빛에 말을 멈추었다.
"괜찮다면 제가 짐을 지겠습니다," 카른이 말했다. "그건 늘 제 몫이어야 했습니다. 당신들은 고향으로 돌아가서 앞으로 일어날 일로부터 고향을 지켜야 해요."
"하지만 넌 안 돼," 카야가 말했다. "넌 움직일 수조차 없잖아."
"저는 너무 늦었습니다," 카른이 말했다.
"너만 그런 게 아냐," 타이바르의 가슴을 밀며 제이스가 말했다. 타이바르가 그를 진정시키자 그는 카른에게 다가가 팔에 퍼진 상처를 보여주었다. "나도 마찬가지야. 내가 다차원을 지킬게."
그는 문 쪽으로 절뚝거리며 걸어가 다른 방으로 갔다. 잠깐의 불편한 침묵 후에 타이바르와 카야가 뒤따랐다.
멜리라는 카른의 머리 쪽으로 다가가 무릎을 꿇고 번들거리는 기름을 닦은 후 더 편안한 위치로 그를 옮기려고 시도했다. 코쓰와 폭발물 팀은 그를 둘러싸고 그가 제약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폭발물을 설치하기 시작했다. 엘스페스는 다른 플레인즈워커를 따르지도 카른을 돕는 일에 동참하지도 못한 채 출입구에 멈춰 서서 카른을 쳐다보았다.
"나도 저기에—그들과—난 여기에 있을까?" 그녀가 물었다.
"이기적으로 생각해서 그랬으면 좋겠지만, 그럴 순 없겠지요," 카른이 쉰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당신이 이 차원을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정말 미안합니다. 저는 당신이 우리와 함께 죽을 필요가 없었으면 좋겠군요."
"카른, 그건 나의 선택이었어."
"당신은 친구들과 함께 이 차원을 벗어나야 합니다. 최후의 대결을 벌일 더 나은 곳을 찾으십시오."
"아니야," 엘스페스가 말했다. "이제 그만해."
카른이 한숨을 쉬었다. 기진맥진한 목소리였다.
"카른이 자유로워지면 우리가 여기서 같이 폭발물을 만들고 도울게," 코쓰가 말했다. "가."
"안 가도 되면 좋겠어."
"괜찮아요," 멜리라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우린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멀리까지 왔어요."
"곧 다시 만나자," 엘스페스는 이렇게 말하고 뿌리로 이어지는 출입구로 들어갔다.
마지막 다리는 길었고, 흰색에 빨간색이 벌집처럼 섞여 있었다.
그녀는 너무나 많은 친구들을 잃었다. 아자니의 영혼은 비뚤어졌고 그가 피렉시아에 흡수된 이상 그의 육체는 이제 죽을 수도 없게 되었다. 카른은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손상되었다. 그녀는 극도로 화가 났다.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운 분노에 가까웠다. 그녀가 상상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많은 것을 잃었다. 그녀의 존재 자체에 아주 깊은, 칼로 조각을 내서 다시는 회복할 수 없는 상처가 난 것 같았다.
엘스페스는 갑자기 빨리 달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단숨에 다리의 절반을 지나 끔찍한 엘레쉬 노른의 제단 복제품에 이르렀다. 이것은 차원파괴자의 뿌리를 엮어 만든 것으로, 골화된 피렉시아인의 몸은 아니었지만 같은 목적으로 쓰이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그것은 눈을 상하게 하면서 마음을 이끄는 구석이 있었고 엘스페스는 그것을 상상 이상으로 증오했다.
제이스는 발을 딛고 일어서서 그녀가 다시 합류한 것에 환영의 인사로 고개를 살짝 끄덕였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곳은 바실리카와 마찬가지로 살아 있는 듯했다. 화성을 알 수 없는 불쾌한 허밍 소리가 공간을 가득 메우고, 불협화음도 아닌 불완전한 파트의 화음이 얹혔다.
"피렉시아인들이 화음을 내?" 카야가 속삭였다.
정전기가 공중에 반짝이며 에테르와 함께 밝은색을 냈다. 줄기에 가까이 다가가자 뿌리의 천장이 떡 벌어져 있었다. 가느다란 뿌리의 태피스트리를 통해 위쪽의 거대한 세계수 본체를 올려다볼 수 있었다. 비틀어진 줄기의 탁 트인 틈은 공허한 우주로 통했고, 안개 사이로 다른 차원의 섬광이 보였다. 위쪽 가지는 타이바르가 말한 '오멘패스’라는 에너지 때문에 치직 소리를 냈다. 이 각도에서는 침공선의 직사각형 하얀 캡슐과 나무를 잇는 긴 통로가 보였다. 피렉시아인들은 이 통로를 이용해 다차원 공격을 준비했던 것이다.
침공선이 뿜어내는 연기는 빨간색이었다. 피와 같은 빨간색, 전염병 같은 빨간색이었다.
"저기에 몇 명이 있을까?" 카야가 말했다." 수백만 명은 될 거야," 조용한 두려움 가운데 카이토가 말했다.
"지난번에는 상대할 만하다고 생각한 정도만 보여줬겠지," 제이스가 말했다. 흰색 침공선은 수확을 기다리고 있는 끔찍한 열매가 달린 가장 높은 가지까지 올라갔다. "그들은 실제 전투를 준비하기 위해 여기까지 내려왔어."
다리 뒤쪽에서 일정한 규칙에 따라 자신만만하게 걸어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일행은 한 명만 제외하고 모두 손에 무기를 들고 한 번에 돌아보았다. 성배를 움켜쥔 제이스는 다가올 갈등을 피하려는 듯 뒤로 움찔했다.
공원에서 반가운 사람이라도 만난 듯 아자니와 티볼트가 걸어왔다. 그러나 그들은 전혀 새로운 사람이 되어 있었다. 아자니는 그의 몸에서 자라난 듯한 빨간색 금속 수트와 흰색 방어구를 입고 있었다. 페어 바실리카를 연상시키는, 엘레쉬 노른의 생물의 표식이었다. 그는 엘레쉬 노른을 기리는 의미에서 날이 뒤집힌 거대한 양날도끼를 들고 있었다.
자신의 스승이 원수를 상징하는 복장을 한 모습을 본 엘스페스는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지만, 얼굴에 띤 미소를 거둘 정도는 아니었다. "어서 와," 그의 목소리는 여전했다. "내가 아끼는 엘스페스. 다시 보니 무척 반갑네. 이렇게 살아남아서 나와 함께해 주니 정말 기쁘군."
"당신과 함께하려고 여기에 온 게 아니야," 그녀는 자기 앞에 검을 꺼내 힘껏 쥐면서 말을 내뱉았다. "당신을 멈추게 하려고 왔어."
"왜 날 멈추고 싶은 거지?" 그는 정말로 궁금하단 듯이 물었다. "이제 우리는 영원히 완벽하고 조화롭게 함께할 수 있는데. 다름도, 갈등도, 고통도 없다. 너는 고향에 있게 되지. 우리가 늘 바라왔단 평화를 가질 수 있고. 모든 것은 하나가 될 것이다."
"절대로 그렇지 않아," 엘스페스가 말했다.
그의 옆에 서 있는 티볼트는 뼈가 다 드러난 판처럼 끔찍한 모습이었고 돌출부는 살아 있는 힘줄을 땋은 것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얼굴에 남아 있는 살 부분으로 웃을 때만 알아볼 수 있었다. 항상 끝이 두 갈래로 갈라져 있던 그의 꼬리는 바닥까지 완전히 갈라져 있었고, 이제는 뿌리 위에서 그가 지나온 길에 번들거리는 기름을 떨어뜨리는 두 개의 독침이 되어 있었다.
"당신은 칼드하임에서도 괴물이었는데, 이제서야 제자리를 찾아갔군," 타이바르는 놀랍게도 차분하게 말했다.
"어린 군주가 머리가 나빠서 무서워해야 할 때를 모르는구나," 티볼트가 비웃었다. "당신은 늘 내 손에서 끝나기로 되어 있었어."
"카이토, 다른 이들이 목적지로 가는 걸 봐줘," 타이바르가 티볼트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며 말했다. "엘스페스와 내가 이 해충을 처리할게."
"타이바르—"
"가!" 그 엘프는 돌아보지도 않고 말을 끊었다. "이 싸움은 우리가 이길 수밖에 없네. 스칼드가 오늘 우리의 대결을 노래하겠지만, 그건 누군가 살아남아서 우리의 이야기를 들려줄 때만 가능하지. 어서 가게."
"정 그렇다면," 카이토는 슬픔의 인사를 억지로 건네며 절뚝거리는 제이스에게 팔을 내주고 그 방의 뒤쪽으로 향하는 입구까지 그를 안내했다 카야가 마지막 아쉬운 표정으로 뒤따르며 세 사람은 변신한 적들 앞에 타이바르와 엘스페스만 남겨 두고 사라졌다.
"좋다," 타이바르가 정중한 태도에 가깝게 말했다. "시작할까?"
엘스페스가 아자니 쪽으로 뛰어오르자 아자니는 큰 함성을 질렀고, 반짝공허 금속이 타이바르의 얼굴에 잔물결을 일으키자 티볼트는 그를 향해 달려들면서 전투가 시작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비명이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