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얄리는 모여있는 저항군 인원을 슬쩍 보고, 본 것의 목록을 작성했다. 마음 속으로, 그녀는 누구의 방패가 깨졌거나 낡았는지, 그리고 누구의 검이 이가 빠졌거나 갈라졌는지를 기록해 두었다. 그와 동시에, 그녀는 누가 다리를 저는지, 누가 잘 쓰는 쪽의 팔을 쓸 수 없게 되었는지, 조용한 용광로 변두리의 황무지를 걸으며 누가 쌕쌕거리는 힘겨운 숨을 내뱉는지 등 동료들의 상태 또한 점검했다.

삽화: Bryan Sola

나이 든 불쇽 여성 사히나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허리가 곧았으며, 꼿꼿한 자부심과 함께 양어깨에 아들 둘을 둘러업고 걷고 있었다. 최근 벌어진 전투로 인해 그녀의 눈은 이제 한 쪽만 남은 상태였다. 그녀의 목덜미는 아직도 말라붙은 피로 얼룩덜룩했다. 네얄리 전에 일행을 이끌던 오리옥 여성 엘함은 그녀가 짊어져야 하는 것보다 더 많은 가방을 지고 쿵쿵 걸어오고 있었으며, 덕분에 그녀의 동료들은 방해받지 않고 움직일 수 있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자원은 너무나 적었지만, 그들은 그 형태에 관계없이 가진 것을 아낌없이 공유했다. 네얄리는 그들에게 휴식을 찾아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스스로에게 맹세했다.

그녀가 불새 오타리와 함께 미렉스의 폐허를 홀로 떠돌던 것은 그리 오래 전 일이 아니었다. 그녀는 마을에서 벌어진 피렉시아의 학살에서 살아남은 다른 사람들이 있는지 흔적을—아무리 작아도, 가능성이 없어도, 어떤 흔적이라도—찾고 있었다. 이제 사람들은 그녀를 의지하고 있었다. 그녀를 신뢰하고 있었다. 네얄리는 이 명예가 무겁지 않게 느껴지는 날이 오기는 할지 궁금해졌다.

생각에 잠겨있던 그녀는 울려퍼지는 오타리의 날카로운 울음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불새가 울부짖자 네얄리의 동료들은 완벽하게 일치하는 움직임으로 즉각적으로 한데 모여 습격에 대비하기 위해 방어 대형을 갖추었다. 아무도 오지 않았다. 피렉시아인들이 침입해오는 낌새도, 잽싸게 달리는 발톱이 돌을 긁으며 내는 숨길 수 없는 소리도, 골리앗이 증기를 뿜어내는 신음 소리도 없었다. 아무 것도 없었다.

하지만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면 오타리가 그들의 위치를 노출시키는 위험을 감수했을 리가 없었다. 네얄리는 목에서 거세게 요동치는 맥박을 느끼며,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 알아내기 위해 절박한 기분으로 동료들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곧 깨달을 수 있었다.

"레이아나, " 네얄리가 속삭였다.

네얄리는 동료들이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붉은 조명이 켜진 복도를 뒤돌아 뛰어갔다. 오타리가 그녀의 머리 위로 따라왔다. 레이아나는 항상 그랬던 것처럼 후방 경계 역할을 맡았었지만, 그녀는 거기에 없었다. 네얄리는 머릿속으로 모든 가능성을 검토해 보았다. 레이아나가 고철 대장 중 한 놈의 습격을 받은 걸까? 하지만 만약 그랬다면 나머지 사람들은 지금 모두 피렉시아인에게 둘러싸여 있었어야 했다. 아무리 우라브라스크가 미란들을 내버려두라고 했다고는 해도, 피렉시아인들이 레이아나 앞에서 멈춰섰을 거라는 것도 말이 되지 않았다.

맨 오른쪽 벽에서 뜨거운 증기가 뿜어져 나오면서 전에 보지 못했던 좁은 통로를 드러냈다: 금속 표면에 난 틈은 인간의 형체가 겨우 들어맞을 정도의 크기였다. 그 틈을 통해 네얄리는 익숙한 실루엣을 보았다. 레이아나였다. 그녀는 낭떠러지를 향해 뒤로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으며, 아래에는 주황색으로 불타는 마그마의 바다가 있었다. 레이아나의 앞에는 시선을 끄는 인간 형체가 있었다. 왼팔은 거대한 크기의 낫으로 변형되어 있었고, 원래의 피부에 감돌던 금빛은 철의 주름으로 거의 완전히 가려져 있었다. 그것은 한때 오리옥 여성이었던 존재였다. 바닥에는 레이아나의 무기가 잊혀진 채로 버려져 있었다. 네얄리는 소꿉친구의 얼굴에 난생 처음 보는 표정이 떠오른 것을 보았다. 마음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부서지기라도 한 듯한 처절한 절망에 빠진 표정이었다.

"너는 마침내 완벽하게 만들어질 준비가 되었다, " 지망자가 낮고 어딘가 익숙한 여자의 목소리로 말했다. 그것은 그렇게 말하며 팔을 들어 레이아나에게 손을 뻗었다: 그 동작에는 묘하게 부드러운 구석이 있었으며, 네얄리는 흐느껴 울고 있는 레이아나를 보고 놀라고 말았다.

인내심이 있는 여성이었다면 지원을 기다리거나 최소한 상황을 더 파악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렸을 터였다. 하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네얄리는 그녀의 불새들만큼이나 본능을 따르는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주먹을 그러쥐고 앞으로 나아갔다. 건틀릿이 작열하는 빛으로 타올랐다. 그녀는 도전의 함성을 내질렀고, 오타리는 거의 곧바로 그 함성에 맞추어 빛나는 날개를 퍼덕이며 네얄리 옆을 빠르게 날아갔다. 불새는 고개를 돌리는 지망자의 얼굴을 잡아 찢었다. 피렉시아인은 피닉스를 반으로 갈라버리기 위해 칼날이 달린 팔을 치켜들었고, 네얄리는 몸을 숙인 다음 주먹을 위로 휘두르며 손목의 부드러운 뼈가 있어야 할 부분을 강타했다.

금속이 산산이 부서지며 쏟아져 내렸다. 어딘가 낯익은 나이 든 오리옥 여성이었던 지망자는 육신을 잃기 전에도 키가 컸던 것이 분명했으며, 완벽해지고 나서도 그 키는 여전했다. 그녀는 비틀거렸지만 비명은 지르지 않았고, 레이아나를 마주보기만 할 뿐이었다.

"부드러운 육신이 완벽하게 만들어진다면 더 이상 두려움도 없을 것이다."

네얄리는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네얄리는 지망자의 망가진 팔을 붙잡아 팔꿈치를 가슴에 박아넣을 수 있는 자세로 몸을 비틀었고, 체중을 전부 실어 힘껏 밀어붙였다. 네얄리는 그 자세로 가장자리를 향해 달려가다가 최후의 순간에 손을 놓았다. 피렉시아인은 비명조차 없이 아래로 떨어졌다.

"네얄리—"

"괜찮아?" 네얄리는 그녀의 친구에게로 달려가 다친 곳이 없는지 살펴보았다. 피렉시아인에게는 딱 하나의 상처만 있으면 되었다. 번들거리는 기름이 한 방울이라도 상처에 닿았다면, 두 사람은 한시라도 빠르게 야영지로 돌아가 레이아나의 피렉시아화가 돌이킬 수 없게 되기 전에 필요한 치료 방법을 찾아야 했다. "너 감염됐어? 녀석에게 기름이 있었어? 상처 좀 보여—"

"네얄리—"

불쇽 여성은 레이아나의 머리를 손으로 감싸 쥐었다. "눈. 눈을 보여줘."

"난 괜찮아. 약속할게." 레이아나는 네얄리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겹쳤다. 그러자 방금 전까지 보았던 껍데기는 사라지고 네얄리의 친구가 돌아와 있었다. 그녀의 또렷하고 감정이 풍부한 이목구비에 활기가 돌아왔다. 그녀는 지쳤지만 따스한 웃음을 지었다. "그녀는 나한테 아무 짓도 안 했어."

"왜 맞서 싸우지 않은 거야? 무기는 어쩌고?"

그녀의 얼굴에 다시 빛이 스쳤다.

"네얄리, 그 사람은 내 어머니였어."


불새 군서지는 휴식을 취하고 있는 불새들의 촛불 같은 빛으로 반짝였다. 불새들이 서로 재재거리는 소리에 불꽃은 점차 희미해져 갔고, 움직이는 그림자에 청록빛을 더했다. 네얄리는 불새들에게 이것보다는 더 넓은 공간을 마련해주고 싶었다. 만약 형편이 괜찮았다면 그녀는 더 튼튼하고 여러 세대의 불새를 함께 키울 수 있는 곳을 만들었을 터였다.. 고철보다는 좋은 재료로 만들어진 횃대와 둥지 상자가 있는 훨씬 더 나은 장소를 말이다.

네얄리는 오타리의 깃털 난 턱 아래를 간지럽혔다.

"언젠가는," 네얄리가 그녀의 친구에게 약속했다. 오타리의 짝은 그 옆에서 잠들어 있었고, 새끼 불새들이 그 옆구리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우라브라스크의 용광로의 잿더미 위에 너희들이 살 장소를 만들어줄게. 너희 아이들은 거기서 따뜻하고 행복하게 자라고, 그 아이의 자손들도 대를 이어서, 그렇게 살아갈 수 있도록."

오타리는 대답하듯이 날개를 퍼덕이고는 목을 쭉 뻗어 기분 좋고 나른한 태도로 네얄리의 손바닥에 뺨을 지그시 가져다 댔다. 네얄리는 그의 깃털을 우아하게 긁어준 후 자기의 새들을 분주하게 돌보고 있는 레이아나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들은 운이 좋았다. 최근 반란군에게 혼란스러운 일들이 많이 벌어졌고, 설상가상으로 사제들 사이에서 우라브라스크가 뭔가 거대한 일을 꾸미고 있다는 불온한 소문이 돌고 있었지만, 불새들은 좋은 짝짓기 계절을 보냈다. 암컷들이 전부 알을 낳았다. 아주 드문 일이었다. 알 중에 절반이라도 살아남는다면 많은 것이 달라질 터였다.

"네 담당은 좀 어때?" 네얄리는 졸고 있는 불새들을 지나 레이아나의 곁으로 가면서 말했다.

"새끼가 없어, " 레이아나는 무미건조한 투로 말했다.

그녀가 옆으로 물러나자 큰 키에 가려져 있던 광경이 보였다. 둥지 안의 깨진 알들에서 인광을 내는 노른자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죽은 병아리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으며 어미가 아직 어려서 새끼에는 큰 관심이 없고 근처에 있는 수컷의 관심을 끄는 데 더 몰두하고 있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네얄리가 놀라 움찔하며 말했다. 네얄리는 친구에게 더 이상의 비극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다.

"작은 동물들 짓이겠지, 아마, " 알껍데기들을 뒤적이며 대답하는 레이아나의 목소리는 텅 비어있었다. "쥐가 한 짓일 수도 있고. 어쨌든 그건 중요하지 않아. 알들은 죽었어. 우리 어머니처럼."

네얄리가 침을 삼켰다. "내가 알았더라면—"

"알아챘을 리가 없잖아. 나도 몰랐는걸. 어머니가 거기 나타나서 나에게 함께하자고 말하기 전까지는."

"네게 물어봤어야 했어, " 네얄리는 자신이 끔찍하게 실패했으며 지독한 대가를 치뤄야 했다는 확신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움직이기 전에 먼저 생각했어야 했어. 그 분을 구할 수 있었을지도 몰라. 뭔가 대책을 세울 수 있었을지도 몰라."

만약을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그랬다고 해도 어머니는 행복하지 않으셨을 거야, " 레이아나가 네얄리와 눈을 맞추며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가 부드러워졌다. "어머니는 심약한 분이었어. 강철보다는 유리 같은 사람이었지. 모든 걸 두려워하셨어. 모든 걸 죽음 또는 그보다 더 나쁜 것의 징조라 여기셨지. 그저 모든 것이 멈추기를 얼마나 간절하게 바라고 계셨는지 어머니의 눈을 보면 알 수 있었어."

레이아나가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그냥 돌아가시는 게 좋지 않을까, 하고 바란 적도 있었어, " 레이아나의 말투에는 끔찍한 위엄이 있었다. "어머니가 통곡하는 소리를 듣는 게 지긋지긋해서, 어머니가 나를 때렸다는 사실이 억울해서도 아니야. 내가 바란 건—"

네얄리는 친구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널 때렸다고?"

"나쁜 뜻으로 그러신 건 아니야. 감정을 분출할 곳이 필요해서 그러셨던 것 같아. 그분이 마주하고 있던 거대한 압박감을 해소할 수 있는 일종의 수단이었던 거지. 그 감정은 표현되어야 했어. 안 그랬다면 어머니는 폭발하고 말았을 거야."

"그래도 그건 잔인한—"

"난 어머니를 사랑했어. 너도 알겠지만, " 레이아나의 조용한 말에서 네얄리는 비난의 기색을 들을 수 있었다. "아직도 그래. 어쨌든, 당신에게도 이제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편이 나은 일일 거야. 나는 어머니의 고통이 끝나기를 바랐어. 이런 생각을 하면 나쁜 딸인 걸까?"

"아니야." 네얄리는 허공에서 맞는 단어를 찾아내려는 것처럼 손을 쥐락펴락했다. "그렇지 않아. 난 완전히 이해해. 피렉시아인들은 우리에게서 너무 많은 것을 앗아갔어. 그래서 우리가 싸우는 거야. 네 어머니에게 일어난 일이 다른 누구에게도 일어나지 않도록 할 수 있어."

레이아나는 숨을 들이쉬었다. 그녀의 호흡은 떨리고 있었다. "만약 피렉시아인들이 옳다면?"

"그런 농담은 하지도 마," 네얄리가 말했다.

"우린 그들이 저지르는 일을 죄악이라고, 영혼을 침해하는 일이라고 부르지. 하지만 네얄리, 네가 어머니를 봤어야 해. 어머니는 평온하셨어. 그렇게 평온하셨던 적이 없었어. 난 어머니가 평화로운 하루를 즐기는 것을 본 적이 없어. 밤에 주무실 때조차도 중얼거리고 흐느끼고 신음하셨어. 오늘 내가 만난 어머니는…안식을 찾으셨어. 내 생각에는—"

네얄리의 온몸에 공포가 흘렀다. 네얄리는 친구의 말이 어떻게 끝날지 알 수 있었고, 그 말이 큰 소리로 내뱉어진다는 것을, 레이아나가 그 말에 숨결을 불어넣는다는 것을 생각만 해도 비명을 지르고 싶어졌다. 순간적으로 네얄리는 레이아나가 차라리 번들거리는 기름에 감염된 것이기를 바랐다. 이런 끔찍한 관점을 가지게 된 것은 피렉시아의 타락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그게 아니라 레이아나가 온전히 스스로 그런 결론에 도달했다는 생각은 너무나도 끔찍했기 때문이었다. "그 평화는," 네얄리가 아주 조심스럽게 말했다, "피렉시아인들이 느끼는 평화는 가짜야. 자아를 잃어버리면서 태어나는 평화야. 그건 네 어머니가 아니었어. 더는 아냐. 아무리 잘 봐줘도 꼭두각시에 불과했어. 강철과 살점으로 만들어진 거짓말이었어."

"그랬을까?"

네얄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망자 하나하나가 미끼야. 사람들을 유혹하기 위한 것이고, 남은 사람들에게 피렉시아화되는 것이 유일한 논리적 선택이라고 설득하기 위한 수단이지. 그들의 목표는 우리의 마음과 영혼을 부수는 거야. 그리고 그게 무슨 가치가 있든 간에," 그녀의 목소리가 부드러워졌다, "너는 그 만남에 정말 우아하게 대처했다고 생각해. 나 같았으면 슬퍼서 미쳐버렸을지도 몰라."

"내가 미치지 않았는지 어떻게 알아?"

네얄리는 친구의 오른쪽 어깨를 손으로 탁탁 쳤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가 어둠 속을 웃으면서 갈 때 네 곁에 친구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줘. 널 만났을 때 약속했었지. 난 널 버리지 않을거야. 무슨 일이 일어나도 네 곁에 있을 거야."

나중에 네얄리가 간이침대로 기어들어갔을 때에야 그녀는 레이아나가 평소와는 다르게 자신이 부르는 소리에 대답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걱정하면서 잠이 들었다.


다음날 어린 불쇽 소년의 목청을 가다듬는 소리에 네얄리는 잠에서 깨어났다. 눈은 엄마를 닮고 체격은 오래전에 사라진 아버지를 닮았다고 들은 사히나의 큰아들이었다. 그녀는 벌떡 일어나 앉은 자세를 하면서 손바닥으로 오른쪽 눈을 문질렀다. 나이가 들었거나,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생각에 지나치게 편안해졌거나 둘 중 하나 때문일 것이다. 네얄리는 전자이기를 간절히 바랐다. 안일해진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했으니까.

"무슨 일이니?"

소년의 표정에 깃든 비참함이 더 커졌다. 그는 네얄리에게 쪽지를 하나 건넸다.

"레이아나가 쓴 거예요," 그는 비통하게 말했다. "레이아나가 떠나버렸어요."


떠났다는 것은 간이침대에 쪽지를 두고 소지품도 그대로 둔 상태를 의미했다. 마치 그냥 잠깐 떠나있기로 한 것처럼. 그들의 배급에도 손대지 않은 채였다. 쪽지가 없었고 네얄리가 좀 더 낙관적인 사람이었다면, 레이아나가 근처 어딘가에 있으리라 생각해버렸을 터였다. 하지만 그런 환상에 빠지기에는 네얄리는 이 세계가 어떤 곳인지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단서를 찾기를 바라며 쪽지를 뒤집어 보았다.

폐품 처리 시설에서 만나자.

레이아나가 거기는 왜 간 거지?

네얄리는 이게 혹시 함정은 아닌지, 레이아나가 억지로 끌려가서 이 쪽지를 쓰기를 강요당했고 네얄리를 유인해 포획하려는 수작은 아닌지 의심했다. 하지만 만약 그런 가능성이 진짜였다면 싸움이 있었다는 어떤 흔적이, 피렉시아인이 야영지의 방어를 뚫고 침입했다는 어떤 징후가 더 많이 있었을 터였다.

어쩌면 레이아나가 자발적으로 간 걸수도 있지, 네얄리는 작게 속삭이는 목소리를 밀어 내리려고 했다.

"거긴 고블린이 지배하는 곳이지?" 엘함이 물었다. 그녀의 흰머리는 피부에 있는 백금빛 주근깨로 인해 더욱 강렬한 느낌을 주었다.

"그랬던 것 같아," 네얄리가 쪽지를 다시 주머니에 넣으며 말했다. 그녀는 갑옷에 망가진 부분은 없는지, 장갑에 녹이 슬지는 않았는지 자신의 장비를 확인했다. 오타리는 횃대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네얄리는 슬로바드를 한 번 본 적이 있지만 멀리서 본 것이 전부였다: 괴물처럼 커다란 고블린의 팔다리는 검은 강철로 부풀어올라 있었다.

"녀석이 용광로의 대장인가요?" 사히나의 막내 아들이 물었다. 그 녀석의 이름이 뭐였지? 부끄럽게도 네얄리는 갈비뼈 안에서 쿵쿵대는 극심한 공포심 때문에 고블린의 이름을 기억할 수 없었다.

"아니," 엘함이 말했다. "그는 쓰레기 처리 담당이야. 우라브라스크는 쓸모없어진 피렉시아인의 용도를 변경하기 위해 그에게 보내지."

용광로 층에서는 버려지는 물건이 없었다. 사용할 수 없는 물건은 다시 가치를 지닐 수 있도록 부품으로 바꾸고, 분해되고 다시 만들어졌다.

"그럼, 녀석이 레이아나에게서 원하는게 뭐지?" 네얄리가 좌절하며 따져 물었다.

"노역?" 오리옥 여인이 말했다. 사히나와 그녀의 막내아들이 모퉁이를 돌아 나왔다. 피는 닦였고 눈에는 붕대가 감겨 있었다. "시설을 혼자서 운영할 수는 없으니까."

네얄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 성찰에 빠지는 것보다는 훨씬 쉬운 답변이다. 적의 이름을 지명하고 바로 싸움을 시작하는 것이 훨씬 간단하다. 그녀는 펼친 손바닥을 주먹으로 내리치며 동료들을 향해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렇지," 네얄리가 말했다. "난 레이아나를 찾으러 갈 거야. 모두가 이 임무에 참가해야 할 의무는 없어. 레이아나는 내 친구고—"

"우리의 가족이기도 해," 엘함이 어깨에 전투도끼를 휘둘러 얹으며 반박은 받지 않겠다는 투로 말했다. 그녀의 종아리가 반들거리는 금빛으로 빛났다. 단순한 의체였지만 관절과 잘 이어진 형태로 잘 만들어진 의체였다.

"내가 실수를 하는 걸지도 몰라."

"우리 모두 누군가를 잃어본 적이 있죠," 사히나가 목소리를 높였다. 그녀의 아들들은 표정이 어두워진 채 시선을 돌렸다. 이 조직의 모든 사람이 그들의 사연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이모와 삼촌들로 가득했던 거대한 가족에서 마지막으로 살아남은 자들이었다. "만약 운이 좋다면 레이아나를 무사히 데려올 수 있을 거야."


조직원들은 한 시간 내에 집결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요 보급품을 인근 야영지로 실어나르며 동쪽으로 향했으며, 불새들도 함께 이동했다. 오타리만이 친구의 곁을 떠나고 싶지 않아하며 네얄리의 곁에 남았다.

격식을 갖춘 작별 이후 네얄리의 조직에 남은 가장 용감하고 완고한 사람들은 폐품 처리 시설 방향으로 출발했다. 시설로 향하는 길은 다른 길만큼 위험하지 않았다. 시설로 이어지는 터널은 용광로 층의 가장 바깥 부분을 둘러싸고 있었으며 주요 통로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용광로와 교차하는 부분은 없었지만 통로는 길었다. 그것만으로도 원치않는 맞닥뜨림이 일어나게 될 위험이 있었다.

하지만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길은 불안할 정도로 텅 비어있었다.

마치 어떤 목적을 가지고 길을 비워 둔 것처럼. 마치 누군가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도중에 발견한 미란 야영지들이 아니었다면 그들은 완전히 무너졌을지도 몰랐다. 하나는 한때 공장의 폐허였거나 지나치게 거대한 골리앗의 내장을 제거한 뱃속처럼 검은 강철로 된 뒤틀린 첨탑이 부러진 갈비뼈들같이 솟아오른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버려진 조립 설비로 가득 찬 중이층 뒤편에도 하나가 있었고, 마지막 하나는 기괴하게 쓰러져가는 구조의 무덤에 있었다. 각 야영지에서 네얄리와 그녀의 일행은 같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강제로 끌려간 흔적도 없이 실종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녀가 원해서 간 거야. 작은 목소리가 다시 속삭였고 네얄리는 점점 그 목소리를 무시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네얄리가 그녀의 충성을 재고해보기 전에 그들은 폐품 처리 시설 위의 돌출부에 도착했다.

한때는 교도소 건물로 쓰였던 것 같은 장소였다. 변형된 철창들이 불안정한 탑처럼 쌓여 있었고, 창살은 짓이겨진 채로 툭 튀어나와 있어서 마치 그 안에 있던 무언가가 탈출하려고 필사적으로 몸부림친 듯한 모양새였다. 많은 감방 안에 쓰러진 형체들이 있었다: 번들거리는 기름으로 세례를 받을 차례를 기다리고 있던, 붙잡힌 미란들이었다. 마치 식물을 흉내 내기라도 하는 듯이, 울타리들 사이로 기계가 휘감겨 있었다. 네얄리의 관심을 끈 건 폐품 처리 시설 한가운데에 자리한, 거대한 검은 파이프들이 핏줄처럼 돋아있는 거꾸로 된 지구라트처럼 생긴 구덩이였다. 각 층은 네얄리가 알아볼 수 없는 용도로 움직이는 부품으로 만들어진 기이한 장치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시체들이 눈에 들어왔다.

셀 수도 없이 많은 피렉시아인의 시체들이 금속이 벗겨지고 살덩이만 남겨지는 순간을 기다리며 무릎 꿇고 있었다. 그 행렬은 마치 맨 아래에 있는 플랫폼을 내려다보는 조용한 관중들처럼 끝없이 위로 이어져 있었다. 그중에 금속으로 된 좁은 틈새를 차지하고 있는 형상이 하나 보였다. 네얄리는 심장이 펄떡이는 것이 느껴졌다. 족쇄에 묶인 채 엎드려 있는 레이아나였다.

"날 위해서 하늘을 감시해줘, 귀염둥이, " 네얄리가 속삭이며 오타리의 뺨에 입을 맞췄다. 네얄리는 팔을 흔들어 불새를 하늘로 날려보냈다. 그런 다음 동료들에게 주의를 돌렸다. "이것은 함정이고 내가 바보처럼 걸려들었을 가능성이 너무나도 높지만, 레이아나는 내 친구야. 난 그녀를 버리지 않겠다고 약속했어. 그 약속을 지킬 생각이야. 하지만 당신들은 그런 어리석은 맹세를 하지 않았지. 여길 떠난다고 해도 어떤 판단도, 어떤 비난도 하지 않을 거야. 지금 떠난다고 해도 명예롭게 떠나는 거야."

모여있는 미란들은 시선을 교환했지만, 아무도 말이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사히나가 지루하다는 듯이 말했다.

"이렇게 시간 낭비 할 건가요, 아니면 주변 구역 확인을 시작할 건가요?"

삽화: Marta Nael

그들은 네얄리가 그만하자고 할 때까지 폐품 처리 시설 전체를 세 번 돌아보았다. 이곳은 거의 완전히 보호되지 않고 있었다. 공기 순도 탐지기에도 숨어있는 피렉시아인이 있다는 신호인 독성 입자의 증가가 나타나지 않았다. 레이아나와 시체들의 집회를 제외하고 시설은 텅 비어 있었다.

"이제 어쩌지?" 원래의 감시 지점으로 되돌아왔을 때 엘함이 말했다.

그녀는 괴로운 마음으로 레이아나가 있는 장소를 내려다보았다. 나도 모르겠어. 네얄리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동료들은 그녀에게 의지하고 있었다. 엘함은 그녀를 쳐다보며 그녀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영웅이었고 스승이었으며 리더 역할을 그만둘 때 네얄리를 믿고 그 자리를 맡겼다.

네얄리는 힘겹게 침을 삼켰다.

"나 혼자서 내려가 보겠어."

그 대답은 엘함을 놀라게 만들었다. "무모한 짓이야."

"전략적인 행동이야," 네얄리가 맞받아쳤다. "우리가 뭔가를 놓친 거라면, 이게 진짜로 함정이라면 놈들은 나에게 집중할 거고, 그러면 당신들에게 반격할 시간을 줄 거야."

"하지만 우리가 수적으로 밀린다면?"

"그렇다면 도망쳐야지."

"네얄리—"

"이건 명령이야," 네얄리는 사람들이 자신의 목소리에서 떨림이 아닌 권위를 느끼기를 바랐다. 그녀는 자신의 허세가 무엇을 의미하게 될지 알고 있었다. 완성. 네얄리는 종종 피렉시아화가 시작되면 원래의 자신은 얼마나 남아있게 될지 궁금해하곤 했다. 자신의 육체가 어떤 짓을 저지르도록 만들어졌는지를 목도하고 영원히 비명을 지를 만큼의 정신이 남아있을까?

비명을 지르게 되긴 할까?

"의장대도 있어야지," 사히나가 으르렁거리며 철처럼 완고하게 오른쪽에서 다가왔다.

"좋아," 네얄리는 손가락을 튕겼다. "거기 세 명. 나와 함께 가자. 나머지 인원은 각자 위치에서 대기하도록."

미란들은 그녀에게 경례한 다음 불쇽 여장부와 쏟아지는 붉은 조명 아래에서 너무나도 어려 보이는 그녀의 두 아들들을 남겨두고 흩어졌다. 그들은 네얄리를 따라 딱 붙은 대형을 이루고 구덩이 아래로 내려갔다. 사히나는 선봉대 역할을 했고, 아들들은 네얄리의 측면에 섰다.

폐품 처리 시설로 오던 길과 마찬가지로 레이아나를 향한 원정도 순조로웠다. 죽은 피렉시아인들은 활성화되지 않은 상태로 조각상처럼 우두커니 있었다. 네얄리는 저 불구가 된 울부짖는 살덩이들이 언제라도 네 사람에게 달려들 것이라고 확신했다. 아무 것도 다가오지 않았다.

그들은 플랫폼 위에 발을 디뎠다. 그들의 무게 때문에 플랫폼이 흔들렸지만 걱정할 정도는 아니었다. 레이아나는 반응이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린 채 누워있었고, 호흡이 얕고 불안정했다.

"레이아나," 네얄리가 친구의 옆에 무릎을 꿇으며 속삭였다.

네얄리는 조심스럽게 레이아나를 돌려 눕혔다. 오리옥은 가만히 있었지만 깨어있는 상태였다. 눈은 뜨여있었지만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았으며, 표정은 친구가 어둠 속으로 걸어가기 전날 밤에 네얄리가 본 것과 같은 비참함으로 흐려져 있었다.

"레이아나," 네얄리는 친구의 이름이 마법의 주문인 것처럼 다시 말했다. "나야. 우리가 널 여기서 꺼내 줄게."

오리옥 여인은 눈을 한 번 깜빡였다. 긴 속눈썹은 마치 기름처럼 검었다. 그녀의 시선이 고정되었다. 얼굴에 서린 고뇌가 더욱 짙어졌다. "미안해, 네얄리. 난 너무나도 지쳐 있었어."

삽화: Josh Hass

네얄리는 머리를 가로저었다.

"미안해할 것 없어. 우린 가족이잖아," 처음으로 단어에 다정함을 담아서 표현한 네얄리의 목소리는 감정으로 가득차 있었다. 네얄리는 레이아나의 손목과 팔에 묶여있는 사슬에 눈을 돌렸다. 사슬은 흔히 보던 생김새가 아니었다. 피렉시아인들이 자주 사용하는 산화된 힘줄처럼 생긴 것보다 더 매끄러웠고 더 아름다웠다. "그리고 가족은 함께 있어야 해."

"미안해," 레이아나는 대답 대신에 다시 말했다. 레이아나의 손가락이 네얄리의 손가락을 쓰다듬으며 팔뚝으로 옮겨갔다. 그 동작에서는 그녀가 친구를 평가하는 듯한, 정확히 말하자면 그녀의 결정을 평가하듯이 사색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정말로."

갑자기 공기의 흐름이 빨라졌다. 한 줄기의 붉은 빛이 레이아나의 팔을 타고, 구속구를 타고, 네얄리의 손가락 마디마디를 가로질러 올라갔다. 네얄리는 본능적으로 뒤로 홱 물러났다. 잠시 후 빛은 어두워지고 사슬 매듭의 형태가 되어 쿵 소리와 함께 플랫폼에 떨어졌다. 구속에서 풀려난 레이아나는 침착하게 일어나 앉아 마치 낯선 사람들을 쳐다보듯 동료들을 바라보았다.

"이럴 줄 알았지," 엘함이 코웃음쳤다. "배신자."

"레이아나, 녀석들이 너에게 뭘 약속한 거야?" 네얄리는 그녀가 자진해서 간 거라고 계속해서 속삭이던 그 작은 목소리가 옳았다는 것이 증명되었다는 사실에 분노하여 소리쳤다. 네얄리는 주변 환경을 훑어보았다. 이제 도망치기엔 너무 늦었지만 네 사람이라면 나머지 동료들을 위해 시간을 벌 수 있을 것이었다. 나머지 사람들이 최후의 순간에 영웅적인 행동을 하지 않도록 알리기 위해 신호를 보내기만 하면 됐다. 그녀의 시선이 연기로 가득찬 하늘을 향했다. 오타리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설마 붙잡힌 건가?

아냐. 불가능해. 피렉시아가 오타리를 잡을 수 있는 방법은 시체로 만드는 것 외에는 없었으며, 그것도 용광로 층을 쩌렁쩌렁 울릴 정도의 싸움이 없고서는 불가능할 일이었다. 미란이 불사조를 희망의 상징으로 보는 것도, 피렉시아인이 불사조를 죽음의 징조로 보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네얄리는 오타리가 저 스모그 속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멀리 날아가렴, 그녀는 마음속으로 불새에게 빌었다. 도망쳐. 다른 사람들을 안전하게 해 줘. 잡히면 안 돼.

"평화를 약속했지!" 레이아나가 비명 소리와 함께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그녀가 내뱉는 단어 하나 하나에 울먹임이 섞여있었다. "모든 사람이 너 같은 건 아냐. 네얄리, 난 겁에 질려 죽고 싶지 않아. 내 어머니처럼 살고 싶지 않아. 멈추고 싶어. 이해 못 하겠어? 다 끝나버렸으면 좋겠다고. 나는 어머니에게 주어진 완벽한 평화를 원해. 슬로바드는—나에게 평화를 약속했어. 내가 사랑하고 그리워하던 사람들과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약속했어.

"그렇게 될 거다," 네얄리의 등 뒤에서 새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그 목소리는 주인의 생김새와는 다르게 놀라울 정도로 평범했다.

그녀가 몸을 홱 돌리자, 구덩이 가장자리에 서 있는 슬로바드가 보였다. 네얄리는 그를 본 적이 있었지만 멀찌감치서 본 것이 전부였고, 당시에는 그를 수백만의 군대 속의 또 다른 피렉시아의 흉물이라고만 여기고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이제 그녀는 그의 진정한 모습에 움찔하게 될 정도로 가까이에 있었다. 그의 자그마한 고블린 형체는 케이블과 금속 도금 다발로 이루어진 거대한 구조물 안에 박혀 있었다. 한쪽 어깨에는 비명을 지르는 고블린 머리 세 개로 장식된 견장이 달려 있었고, 네얄리는 슬로바드의 팔다리가 잘려 나간 부분을, 관절 부분에서 절단되어 골렘과 같은 피렉시아 몸체 외골격에 납땜 된 것처럼 붙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삽화: Chris Seaman

"우리는 적이 아니다," 그가 말했다. "저 바깥의 세상은 힘겹고 차가우며 모든 것을 앗아간다. 친구도, 가족도. 하지만 여기에서는? 우린 안전해. 우린 가족이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전부 여기에 있지, 응?"

슬로바드는 자신의 거대한 손을 내려다보다가 네 사람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네가 네얄리로군."

그녀의 동료들은 자리를 잡고 무기를 준비했다. 완벽하게 되기 전에 죽음을, 네얄리는 생각했다. "난 네가 두렵지 않아."

"왜 날 두려워하는 거지? 여기엔 잔인한 것이 없잖아, 응? 너희들 중 누구도 다치게 하고 싶지 않다. 그저 너희들이 사랑하는 사람과 다시 만날 수 있게 해 주려는 것뿐이야," 슬로바드가 부드럽게 말했다. "미란은 네게서 리더십을 기대하지. 그들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집으로 인도하지 않겠는가?"

"아버지?" 어린 불쇽 중 한 명이 훌쩍거렸다. 그의 손에 든 창이 덜덜 떨렸다.

슬로바드의 곁에 사슴 같은 뿔이 나 있고 거의 온몸이 강철로 감싸인 불쇽 남성 지망자가 서 있었다.

"집중해," 그녀가 동료들에게 경고했다. "흔들리지 마."

"너희에게 선택할 기회를 주겠다. 거기 네 명과," 슬로바드가 말했다. "숨어있는 나머지 미란 모두에게 말이다."

네얄리는 심장이 내려앉는 듯한 기분이었다.

슬로바드는 알고 있었다.

"우리는 당신이 어떤 결정을 내리든 당신과 함께하겠어," 사히나가 조용히 말했다. "같이 죽자고 말한다면, 그렇게 하겠어. 마지막까지, 네얄리." 그녀의 목소리의 평온함에는 실낱같은 금이 가 있었다. 네얄리는 지금 여기 그들의 위에 서 있는, 그녀가 죽었다고 생각한 반려자 혹은 그의 껍데기에게도 똑같은 말을 맹세했었는지 궁금해졌다. "마지막까지 함께할게."

네얄리는 레이아나가 있던 자리를 돌아보았다. 레이아나는 무릎을 꿇고 앉아 마치 기도를 올리듯 손을 깍지낀 채 흔들고 있었다. 그녀는 기름이 아닌 눈물을 흘리며 울고 있었다. 레이아나가 타락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오히려 모든 것을 더 최악으로 만들고 있었다. 레이아나가 이것을 선택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 레이아나가 자진하여 미끼가 되기로 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 너무도 고통스러웠다.

너무나도 바보같은 네얄리는, 그녀의 모든 본능이 그렇게 하지 말라고 간청했음에도 덫으로 똑바로 걸어들어갔다. 하지만 이 상황을 구제할 여지가 아직 있었다.

"왜 우리가 널 믿어야 하지?" 네얄리가 말했다. "네가 우리 전부를 데려가지 않을 지도 모르잖아. 우라브라스크가 명령을 내렸지. 우리에게 해를 끼치는 것보다 더 나은 일을 해야 하는 거 아닌가?"

"해를 끼쳐? 왜 내가 너에게 해를 끼쳐야 하지, 응? 난 그러고 싶지 않다. 너를 돕고 싶을 뿐이다."

네얄리는 그녀 때문에 파멸로 끌려 들어온 사람들을 흘끗 보며 힘겹게 침을 삼켰다.

"그걸 정말로 믿는다면 저 세 사람은 보내줘."

"그렇게 하지."

"네얄리—"

"." 네얄리가 말했다. "저 녀석이 마음을 바꾸기 전에."

네얄리는 나이 많은 불쇽이 긴장하고 그 아들들이 떨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한 명은 울먹임을 애써 참고 있었고, 다른 한 명은 좌절감으로 씩씩거리는 소리를 억누르고 있었다. 그리고 사히나는 거의 눈치챌 수 없을 정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세 사람은 네얄리를 지나쳐갔다. 그의 말대로 슬로바드와 그의 부하들은 번쩍거리는 눈으로 지켜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네얄리는 레이아나가 번들거리는 기름을 받게 될 곳보다 훨씬 높은 곳에 있는 철창에 갇히게 된 것이 슬로바드가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베푸는 자비라고 생각했다. 이 위치에서 보면 네얄리는 그녀의 친구가 모르는 사람이라고, 자신과는 아무 관련 없는 배신자라고까지 생각할 수 있었다. 최소한 나머지 조직원들은 안전해. 네얄리는 그 말을 생명줄처럼 붙잡고 속으로 생각했다. 최소한 오타리는 안전해.

그녀는 그 말에 최대한 오래 의지하고 있을 작정이었다. 운이 좋다면, 저항군이 그녀를 쓰러뜨리는 순간이 왔을 때 그것이 그녀를 충분히 느려지게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를 터였다.

놀랍게도 레이아나의 변신을 시작하러 온 사람은 사제가 아니라 슬로바드 자신이었다. 그 고블린이 네얄리의 친구를 무릎을 꿇게 만들고 기름에 담그는 방식에는 다정함이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 있는 황동빛 원이 마치 축복을 받는 것처럼 들어올려졌다.

네얄리는 차마 그 광경을 볼 수 없어서 눈을 돌려버리고 말았다.

최소한 나머지 조직원들은 안전해. 네얄리는 속으로 또다시 말했다. 최소한 오타리는 안전해.

바로 그 때 부드럽게 딸깍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의 머리 위 쇠창살에 날짐승의 발톱이 내려앉는 소리였다. 불새가 인사하듯 낮은 음으로 연달아 울면서, 금속 조각들 사이를 부리로 찔렀다.

"여기서 뭐 하고 있어?" 목소리에서 안심한 기색을 감추려고 했지만 실패한 채로 네얄리가 속삭였다. "넌 여기서 떠나야 해."

불새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한쪽 눈을 그녀에게 고정하고 숨을 들이쉬었다.

"나는 한 명이잖아. 이럴 가치가 없어. 너는—"

네얄리는 자신의 위선에 충격을 받았고 미친듯한 웃음이 터져나오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이 모든 것이 한 명의 사람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녀는 레이아나를 구하기 위해 모든 것을 바쳤다. 그랬다. 레이아나 한 명의 목숨이 그만큼 소중하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오타리가 숨을 내뱉었다.

불새의 화염이 철창을 불살라버리자 유황을 머금은 공기가 더러운 오렌지색에서 눈부시게 빛나는 청백색으로 변했다. 여전히 금빛으로 빛나는 재가 산들바람에 흩날렸다. 그는 다음 철창을 향해 날아갔고, 폐품 처리 시설에 경보가 울릴 때까지 똑같은 행동을 반복했다. 오타리는 그 소리에 반항하듯이 소집의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네얄리는 기쁜 외침으로 화답했다.

"우리가ㅡ" 그녀가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오타리가 풀어준 미란 각자에게 그녀의 피부에 달라붙어 있던 불덩이의 형체를 한 마법이 튀어올랐다. 네얄리는 슬로바드가 그의 커다란 망치를 든 채 기다리고 있는 곳을 내려다보았다. "우리가 죽는 곳은 여기가 아니다."

탑처럼 솟은 구조물들 사이를 가로질러 빠르게 움직인다면 피렉시아인들이 따라잡을 수 없을 것이었다. 철창으로 기어 올라오는 몇몇 피렉시아인들은 오타리의 불길 때문에 가까이 오지 못하고 있었다. 네얄리는 혼란한 와중에 레이아나를 찾았고, 뒤에서 소란스러운 광경을 올려다보고 있는 그녀를 발견했다. 그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마지막 시도로 손을 내밀었다.

레이아나는 그 손을 외면했다.

그걸로 끝이었다. 네얄리는 침을 삼켰다. 그녀에게는 레이아나와 논쟁을 벌일 시간, 항복해야 할 이유가 없고 맞서 싸워야 한다고 주장하며 레이아나와 다퉈야 할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각자의 결정을 내렸다. 이제 각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네얄리는 한때 친구였던 사람에게 인사를 했다. 저 멀리에서 네얄리의 무모한 임무에 따라오기로 했던 사람들뿐만 아니라 모든 인원이 탈출로를 만들기 위해 폐품 처리 시설로 돌진해오는 광경이 보였다. 슬퍼할 시간은 나중에 가질 수 있을 터였다.

지금은 사람들을 이끌고 도망쳐야 할 때였다.

삽화: Lie Setiaw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