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쇠가 트레이벤에 있다면, 안전하게 보관되어 있을 거라고 했잖아. . ."

찬드라의 말에 누군가가 대답하기도 전에 불경한 시체의 신음 소리가 되돌아왔다. 카야는 코를 틀어막았다. 테페리도 이미 틀어막은지 오래였다. 입으로 숨을 쉬고 있었음에도 여전히 불쾌한 듯 했다. 한낮의 태양은 하늘 높이 떠 있었지만, 구름이 모여들어 성당의 잔해에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하늘마저 그 광경을 부끄러워 하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보던 아를린은 속이 울렁거리는 것 같았다. 그녀가 책을 읽으며 화창한 시간을 보냈던 첨탑은 이제 파편이 되어 땅에 흩뿌려져 있었고, 소중히 여겼던 스테인드글라스도 산산조각이 나 있었다. 우글거리는 언데드들을 보는 것조차 그 시절에 대한 배신처럼 느껴졌다. 예전에 알던 사람이 언데드가 되었을 가능성에 대해서는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녀는 침을 삼켰다. 개미집 주변에 개미가 모여들 듯이 좀비들이 성당 주변을 에워싸고 있었다. 그들을 뚫고 지나가는 일도 쉽지 않을 터였다.

Light Up the Night
Light Up the Night | Art by: Wei Wei

"안전하게 있을 지도 모르지," 아델린이 말했다. "조사를 끝낼 때까진 알 수 없어."

그리고 그들은 조사를 좀 했다. 아니, 카야가 했다고 하는 게 맞다. 그들이 트레이벤까지 오는 데에는 사나흘 정도가 걸렸다—여기저기를 둘러보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녀가 일을 계속하기에는 직감만으로는 부족했다. 트레이벤에 도착하자마자, 카야는 일행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자기 나름의 정찰을 했다. 어디를 다녀왔는지 모를 그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먼지 투성이인 책을 손에 들고 돌아왔다.

"77페이지야," 그녀가 말했다.

그 페이지에는 아주 상세하게 그려져 있는 채색된 목판화가 있었다: 카틸다를 닮은 마녀가 한 가족에게 상자를 건네주고 있는 그림이었다. 아래에는 가보니 지역의 버트졸드 가문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었다.

예전에 성당에 있을 적에 아를린은 워린 버트졸드라는 사람을 알고 있었다. 워린은 나이가 많은 대주교이자 아주 엄격한 사람이었다. 그를 생각하니 쥐어진 주먹이 아렸다. 그녀의 가슴도 미어졌다. 지금쯤 워린이 있을 법한 곳은. . .언데드 무리 속 일 테니까.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저 안에서 그녀의 옛 친구들이 얼마나 많을 지는 누가 알겠는가.

"그가 보이는 것 같아." 아델린의 목소리에 아를린은 정신을 차렸다. 아델린은 검을 들어 파괴된 성당의 회중석 쪽을 가리켰다. 사제복을 입은 누군가가 설교단 앞에 서 있었다. 아를린은 몸서리를 쳤다. 그는 모여든 군중들에게 설교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고, 좌석에는 앉아서 박수를 치고 고개를 숙이며 기도하는 좀비들이 가득했다.

고역이 이 곳에 해 놓은 짓은 정말로, 진정으로 불경한 짓이었다. 한 때는 엘드라지와 맞서 싸우기 위해 릴리아나는 좀비들을 불러일으켰다. 살아 있는 시체들과 전장을 공유해야 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힘든 일이었지만, 일이 끝난 이후에 남을 좀비들을 처리해야 하는 일은 더 힘들었다. 남은 좀비들을 어떻게 해야 할 지에 대해 누군가가 릴리아나에게 물었던 것을 떠올렸다. 릴리아나는 "좀비는 쓸모가 아주 많다고. 창의적으로 생각해 봐,"라고 대답했다.

아를린의 마음이 무거워졌다. 여기는 그녀가 사랑한 모든 것들을 모욕하고 있었다. 이곳이 한때 어떤 곳이었는지를 그녀는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를린은 저 언데드 남자가 입고 있는 사제복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는 진저리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맞아.

"그러면 어쩔 수 없네," 카야가 말했다. "누군가 돌파해서 길을 내야 해."

아델린은 자신의,아마도 천둥벼락이나 사자방패 같은 영웅적인 이름을 붙였을 분위기의 백마 위에 올라탔다. 말 위에 올라탄 그녀를 보니 희망이 어느 정도 생겨나는 기분이 들었다.

"돌파는 나한테 맡겨 둬," 아델린이 말했다. "나를 비롯한 우리 성전사들은 이미 오랫동안 언데드들과 싸워 왔으니까. 너희 넷은 워린에게 가는 것만 집중해."

찬드라는 좀비 떼를 쳐다본 뒤, 다시 아델린에게 시선을 돌렸다. "잠깐만, 싸움을 너희들끼리 다 하겠다고? 그렇게는 안 되지," 그녀가 말했다. "나도 도울게. 너희 셋이 워린한테 가." 찬드라가 열정적인 웃음을 띠며 주변을 뜨겁게 덥히자 그녀를 에워싼 공기가 흐릿해졌다. 이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찬드라는 마음껏 날뛰기 직전이었다.

아델린이 다시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좋아. 내가 선봉을 맡고, 뒤를 맡길게 찬드라 날라르," 그녀가 말했다.

찬드라는 대답 대신 경례 비슷한 동작을 했다. 심각한 상황이 아니었다면, 아를린은 미소를 지었을 수도 있었다. 지금 당장은 그들이 잘 어울리고 있음에 희미한 행복을 느낄 수 있었지만, 그 행복감은 그녀가 훼손된 회중석 쪽을 쳐다보는 순간 사라져 버렸다.

시간을 낭비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아델린과 성전사들이 앞서서 돌격했고, 그 모습은 마치 신성한 망치가 언데드들로 만들어진 모루를 내려치는 것 같았다. 아델린의 명령은 그녀의 칼날만큼이나 빠르고 정확했다. 나무에서 열매가 떨어지는 것처럼 머리들이 몸에서 떨어져 내렸다. 언데드 한 마리가 그녀에게 뛰어들었지만, 허공에서 속도가 느려졌다. 테페리의 지팡이에서 뻗어나온 파란 광선이 언데드의 전진 속도를 늦추고 있었다. 아주 약간 늦췄을 뿐인, 대단하지 않은 마법이었지만, 아델린이 좀비를 방패로 쳐낸 뒤 그 목줄기에 검을 꽂아넣기에는 충분한 시간을 벌었다.

길은 그리 오랫동안 열려 있지 않을 터였다.

어렵게 싸워 얻어낸 안전한 틈 사이로 전진하면서, 카야는 사라졌다 나타났다를 반복하며 깜빡였고, 아를린은 변신하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그녀의 입 속은 밀려드는 망자들의 썩은 팔 맛으로 가득했다. 그녀는 자연으로부터 선사받은 발톱을 사용해 얼굴과 이빨, 그리고 다리를 공격하면서 공격을 가능한 한 피하려 했다. 하지만 언데드의 침이 그녀의 털가죽 위로 떨어져 내렸고,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그녀의 귓속에 스며들었으며, 시체들의 악취가 그녀의 목구멍을 가득 메웠다.

후방을 맡은 찬드라가 나서자 그제서야 아를린은 안전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의 두 손에서 거대한 불길이 두 갈래로 뿜어져 나와, 이제는 사라져 가던 테페리의 마법 방벽을 훨씬 견고한 방어막으로 대신했다. 탈리아가 보여줬듯이 망자들조차도 불은 무서워했다. 좀비들이 한 목소리가 되어 비명을 지르며 살갗을 태우는 불길로부터 물러나자, 영웅들과 언데드 사이의 간격이 더 넓게 벌어졌다. 그럼에도 찬드라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다른 사람들이 전진하는 속도에 맞춰 찬드라는 좀비 무리를 향해 마치 생명의 숨결 그 자체처럼 보이는 불길을 불러일으켰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좀비들이 가득했던 곳에, 이제는 모두 재가 되어 바람과 함께 사라졌다.

아델린은 찬드라가 생명을 구해 주는 거대한 파괴—그녀가 다루는 원소의 본질—에 둘러싸인 채로 주황색 불길을 내보내 좀비들을 삼켜 버리는 모습을 어깨 너머로 봤다.

아델린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아를린은 알 수 없었지만, 자신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 어떤 상황이든 간에, 절대로 찬드라 날라르를 화나게 해서는 안 된다고 말이다.

교회에 들어가는 일은 쉽지 않았지만, 불길과 검이 이를 조금은 쉽게 만들어 주었다. 주변을 둘러싼 벽은 고역에 의해 부서져내린 뒤 무언가 다른 비틀린 모습이 되어버렸다. 워린의 이해하기 어려운 신음소리가 점점 가까워져 왔다. 한때 신성했던 벽을 불길이 훑고 있었다. 아를린은 마음이 아팠지만 불길이 일종의 정화 역할을 해 주기를 바랬다.

"아직이야?" 찬드라가 소리쳤다. 거세게 타오르는 불길 너머에서 들려오는 그녀의 목소리는 알아차리기 힘들었지만, 아를린에게는 들렸다. 앞으로 뛰쳐나갔다.

아델린은 워린을 일으켜세워 벽에 기대게 했다. 그는 한때 아를린에게 가르쳐주었던 기도문을 소리 없이 웅얼거리고 있었다. 아를린이 인간의 모습으로 되돌아오자, 눈곱이 잔뜩 켜 있는 언데드의 눈에 초점이 돌아왔다. 그는 아를린의 이름을 말하려는 듯이 입을 움직였고 손으로 그녀를 가리켰다. 아니, 아마도 그저 육즙이 가득 찬 살덩이를 가리킨 것일 수도 있었다. 아를린은 자신을 알아본 것이라고 믿고 싶었다.

"워린, 저에요," 아를린이 말했다. "저 기억나시죠?"

"데닉?" 이란 대답이 나왔다. 그녀는 어깨 너머를 흘끗 뒤돌아보았다. 찬드라가 남은 좀비들에게 밀리며 가까이 오고 있었다. 아델린과 성전사들은 아를린과 워린 주변을 둥글게 에워싸고 있었다.

"워린,"자신이 한때 알고 있었던 사람이었던 흉물 앞에서 침착함을 유지하려 애쓰면서 아를린은 말했다, "우리는 은달빛 열쇠를 찾고 있어요. 그게 어디에 있는지 아나요?"

그의 두 눈이 하나씩 차례로 깜빡였다. 이빨이 다 빠진 턱은 굳게 다물어졌다.

정적뿐이었다.

아델린의 칼이 망자들을 베어넘기는 소리와, 불길이 휘몰아치는 소리가 들려 왔다. 카야와 테페리는 아를린을 지켜보고 있었다.

"열쇠 말이에요, 워린," 아를린이 말했다. 그녀는 그의 어깨를 두 손으로 붙잡았다. 워린은 이제 그녀로부터 눈을 돌릴 수 없었다.

"데닉," 그의 답이었다.

"아를린, 오래는 못 버텨!" 아델린이 소리쳤다.

"열쇠요," 아를린이 다시 부탁했다.

"데. . .데닉. . ."

아를린은 나지막이 욕설을 내뱉었다. "받을 수 있는 정보는 다 얻어낸 것 같아!"

"좋아," 찬드라가 말했다. "아델린, 이번에는 네가 내 뒤를 맡으라고!"

그리고 불길이 다시 성당을 집어삼키자, 아를린은 워린에게 유일하게 해 줄 수 있는 휴식, 균열, 기도, 그리고 앞으로는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주었다.


누군가를 잘 안다고 생각하는 경우에도, 대다수는 그들의 일부분만을 알고 있을 뿐이다. 생전의 워린은 엄격한 강사였다. 아를린은 그와는 신학 이외의 주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던 적이 없었고, 그가 내놓은 대답은 언제나 고민을 한 점이 드러나는 내용들이었지만 그녀는 항상 워린이 교회에 자신의 삶을 바친 부류의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이따금 가보니에서 보낸 자신의 유년 시절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긴 했지만, 그 외의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 버트졸드가의 고향이라고 불렸던 조용한 가보니 마을에 도착한 관문수호대는 사람들에게 최대한 질문을 묻고 다녔다.

"워린과 데닉을 아냐고?" 한 철 내내 길러 낸 호박 위에 덮인 서리를 쓸어내던 여성이 말했다. 나이가 들었지만 농작물을 가꾸는 일을 그만두지 못해 보이는 그녀의 손은 숙련된 손짓으로 농작물을 다루었다. "허, 슬슬 누군가가 그 사람들 이름을 부르며 나타날 것 같다는 생각은 했지."

아를린은 몸을 숙이며 그녀의 옆으로 왔다. "그렇군요. 너무 오래 걸려서 죄송해요. 폭설 때문에 좀 늦어졌어요."

"폭설이라기엔 과하지," 여성이 대답했다. “이건 고작 서리야. 그걸 변명이라고 할 만큼 어린 나이는 아니지 않니.”

아를린은 살짝 씩 하고 웃었다. 그녀가 아무리 많은 세계를 가 보았다고 해도 역시 고향만한 곳은 없었다. "옳은 말씀이에요." 그녀는 대답했다. 주변에 내린 눈은 아주 가볍게 깔려 있어서 그녀가 만지기만 해도 녹을 정도였다." 그래도 데닉에 대해서 알려 주시면 좋겠어요."

노년의 여성은 아를린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너무 늦게 왔어."

"너무 늦었다구요?" 얼굴을 찡그리며 아를린은 다시 물었다.

"데닉이 고역 전에 죽지 않았다면, 지금은 확실히 죽었겠지," 그녀는 말했다. "그 오래된 가문의 저택에서 숨어 지냈어. 자기 말로는 안전을 위해서 지내는 거라 그러더군. 그 뒤로는 본 적이 없어. 그곳은 심각하게 귀신이 들렸거든."

아를린은 어깨 너머를 쳐다보았다. 언덕 위에 세워진 버트졸드 가문의 저택은 그녀가 있는 곳에서도 벌려진 입마냥 창문이 깨진모습이 잘 보였다. "귀신들린 집엔 왜 간건가요?"

노년의 여성은 손을 탁탁 털었다. "데닉은 워린의 아들이니까."


고역은 이니스트라드의 모든 것을 파괴했지만, 다시 만들어지는 것도 있었다. 사람들의 필사적인 손들이 꾸준히 나무나 거칠게 다듬은 철로 돌을 깎아내면서, 길가에 있는 아바신의 뒤틀려 버린 상징물들을 예전 모습으로 되돌려 놓았다. 관문수호대는 산산조각 났다가 주변에 있는 잔해들을 마치 봉합술사가 와서 이어 붙인 것 같이 다시 세워진 집들을 지나갔다. 사람들은 한결 같았다. 낯선 사람들이 마을을 지나가는 동안, 어떤 이들은 마음 속에 상처를 품고 있었고, 몇몇은 그저 그들의 아이들을 좀 더 주의 깊게 지켜보았고, 또 어떤 이들은 자신의 의수와 의족을 더 꼭 끌어안았다.

이니스트라드는 부서지고, 이니스트라드는 일으켜세워지고, 이니스트라드는 살아남는다.

좋은 신념이기는 했지만, 이 저택만큼은 그 말과는 정반대의 상황이었다. 버트졸드 저택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주변은 점점 더 황폐해졌고, 사악한 기운이 짙어졌다. 이것을 아를린은 ‘악’이라고 밖에 부를 수 없다고 확신했다. 창문이 그들을 내려다보는 방식이, 덩굴이 돌벽에 얽혀 있는 모습이, 입을 벌린 문의 모습이 그랬다.

아를린은 쳐다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야만 했다.

관문수호대 중에서 가장 힘들지 않게 보이는 사람은 카야였다. 그들이 집으로 다가갈 때 그녀는 아무런 두려움도 내비치지 않았다. 입을 크게 벌리고 있는 저택의 문에도 그녀는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그녀는 미간을 찌뿌리며 저택을 위아래로 훑어본 뒤, 엄지손가락으로 코를 튕겼다." 그래서, 데닉이 여기 안에 있다는 거야?"

아를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악한 영혼들도 한 무더기 있을 거고 말이지, 그렇지?"

"그럴 만한 장소인 것처럼 보이긴 하네," 찬드라가 말했다.

"나한테 신성한 문양이 몇 개 있어—" 아를린이 말을 꺼냈지만, 카야가 손을 휘저으며 그녀의 말을 가로막았다.

"아니 괜찮아," 카야가 말했다. "그냥 5분만 기다렸다가 뒤따라 들어와. "

Thraben Exorcism
Thraben Exorcism | Art by: Matt Stewart

그리고 예상대로 카야는 누군가의 허락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녀는 곧장 저택의 입구로 걸어들어갔다. 카야가 부리는 마법의 날카로운 향기가 공기를 가득 채우자 아를린의 코는 얼얼해졌고, 그와 함께 낮게 웅웅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델린은 안쪽을 들여다보기 위해 부서진 창문들 중 하나로 다가갔고, 찬드라도 같은 창문을 보며 안을 확인했다. 두 사람의의 반응으로 미루어 볼 때, 안에서 카야가 꽤나 날뛰고 있는 모양이었다.

충동에 저항하는 일은 가끔 쉽지 않다. 토볼라르도 그렇게 말할 거라고 생각하니 아를린은 씁쓸해졌다. 자제하는 것은 인간이 하는 것이지 야생이 하는 것이 아니라고. 자신의 열정과 본능을 따르는 것이 답이라고 말이다. 그가 아를린에게 가르쳐준 것들이었다.

교회는 그와는 반대되는 것들을 가르쳐 주었다.

아를린은 창가에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안쪽에서는 카야의 유령 형태가 회색빛을 띤 흰 줄기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곳에 있던 유일한 유령은 카야 뿐만이 아니었다. 노년 여성의 말이 맞았다: 이 장소는 심각하게 귀신이 들려 있는 곳이었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을 터였다. 카야는 믿을 수 없는 속도로 유령들을 쓰러뜨리고 있었다. 그녀는 눈으로 쫓기 힘든 속도로 유령들 사이를 누비면서, 한쪽에서는 유령의 등에 칼을 꽂고 있는가 하면 다른 쪽에서는 유령의 목을 베고 있었다. 아를린은 문득 퇴치된 유령들이 소멸된 다음에는 어떻게 될지 궁금해졌다. 축복받은 영면이 이들을 데리러 오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가 찾아오는 것인지 말이다.

나중에 카야에게 물어봐야지 싶었다.

현재로서는 이 방에 초자연적인 위협들이 없어진 상태였다. 가장 먼저 방으로 들어간 사람은 찬드라였고, 그 뒤를 아델린과 아를린이 따랐다. 이번에는 테페리가 후방을 맡았다. 유령들은 그를 그다지 신경쓰는 것 같지 않았고, 테페리는 편안한 걸음거리로 따라왔다.

하지만, 층이 하나 더 있었다.

그들은 숨을 죽인 채로 삐걱대는 계단을 밟으며 위로 올라갔고, 낡아빠진 문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웅웅대는 소리가 점점 더 커져만 갔다. 찬드라가 문을 열려고 가까이 다가가자 아델린이 어깨에 손을 올리면서 제지했다.

"내가 갈게," 그녀가 말했다. "내 뒤에 있는 편이 안전해."

아델린은 어느 전설에서라도 걸어나온 사람인 것인가? 용맹한 점도 한 몫을 했지만 자신의 온 힘을 모두 실어 문을 부수는 방식에서도 그러한 면모가 두드러졌다. 안에서는 카야가 유령 하나에 무심한 듯이 기대고 있었다. 관문수호대 일행이 방 안으로 들이닥치자 그녀는 놀리는 듯이 인사를 했다.

"여기 너희가 찾던 데닉이야," 그녀가 말했다. "찾는건 쉽고 간단했어."

테페리가 재미있다는 듯이 흥얼거렸다. "5분도 채 걸리지 않았군 그래."

"당신한테 그런 말을 듣다니 재미있네." 카야가 대답했다. "당신은 싸우는 즉석에서 시간을 만들어내잖아?"

"그게 말처럼 쉽기만 하다면 말이지," 그가 말했다. 테페리는 어깨 너머로 쳐다보며 동정심 어린 미소를 지었다. 그는 떠있는 유령을 향해 손짓했다—그 남자는 서른이 채 되지 않아 보였고, 아마도 자신의 것으로 추정되는 해골이 돌더미 사이에 박혀 있었다. 시신과 유령이 같은 거칠게 다듬어진 옷을 입고 있었다. "자네에게 양보하지."

아를린은 기다리지 않았다. 그녀는 악수하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면서 그에게 다가갔다. "데닉이지? 내 이름은 아를린 코르드야. 네 아버지의 친구였지."

유령의 눈이 휘둥그레지는 것을 보는 일은 얼마나 기이한 경험인가. "제 아버지요? 아버지가 보내신 분인가요?"

Dennick, Pious Apparition
Dennick, Pious Apparition | Art by: Chris Rallis

가능하면 진실을 알려 주는 것이 최선이다. 그 진실이 얼마나 보기 흉하든 상관없이 말이다. "그렇다고 할 수는 없겠네. 네 아버지는 돌아가셨거든. 내가 직접 네 아버지를 안식에 들게 해 드렸고, 마지막 순간에 네 이름을 부르셨어."

"안식에 들게 해 드렸다고요?" 유령은 걱정스러운 듯이 손가락을 꼬았다. "그 말은 아버지가. . .언데드라는 말씀이세요?"

"언데드셨지," 그녀가 대답했다. "거기에 연연하지 않는 게 좋아. 하지만 난 여기에 중요한 걸 물어보려고 왔어, 너희 가문이 지키고 있는-"

"아. 친목을 위해 오신 게 아니군요?"

"그래, 아니야," 아를린이 말했다. "부탁이야. 은달빛 열쇠에 대해 아는 게 뭐라도 있으면 알려줘. 이니스트라드가 지금 그걸 필요로 하고 있어. 밤이 길어지고 있고, 이 모든 걸 바로잡을 의식에 그게 필요해."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찾아와서, 혹시 절 보러 오신 게 아닐까 생각했어요," 데닉이 대답했다. 그는 손가락을 빙빙 돌렸다. "많은 사람들이 열쇠를 원하죠. 저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아버지는 제가 진정한 버트졸드 가문 사람이 아니라고 말씀하시곤 했어요."

"그건 네 아버지가 뭘 몰라서 그런 거야," 아를린이 말했다. "넌 여느 버트졸드 가문 사람들과 동일하게 이 저택에 있잖아. 그리고 네가 열쇠가 어디에 있는지를 우리에게 알려줄 수만 있다면, 너는 네 가문의 그 누구보다도 그 의무를 잘 수행해 내는 거야."

어째서인지 그 유령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마도 그런 것 같네요," 그가 대답했다. "좋아요. 그러니까. . .저도 열쇠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있어서 이곳을 좀 조사해봤어요. 그런데. . .알고 보니 여기에 없었어요. 제 증조할아버지가 어떤 흡혈귀에게 안전하게 보관하라고 건네주셨더군요. 웃기는 일이죠?"

카야는 코를 다시 틀어막았다.

찬드라는 숨을 몰아쉬었다. 그녀는 손가락을 들어올렸다. "미안한데, 어느 흡혈귀인지 물어봐도 될까?"

데닉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면 안식에 들게 해 주시겠어요?"

"그게 네가 원하는 거라면," 아를린이 말했다. "하지만 이니스트라드가 위험에 처해 있지 않다는 걸 안다면 더 편하게 쉴 수 있지 않겠니?"

마치 그 말을 곱씹어 보기라도 하는 듯 데닉은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서는 "마르코프 가문이에요. 그 가문의 왕자가 가져갔죠. 혹시 아버지가 절 보고 싶다고 하시던가요?"

"난 이미 최악의 상황을 예상하고 있었어," 이미 문쪽으로 걸어간 찬드라가 말했고, 아를린은 뒤에 남아있었다.

데닉은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 싶어 했고 그녀는 최소한 이를 들어 줄 수는 있었다—적어도 잠시 동안은 말이다.


이니스트라드는 다시 세워 올려진다.

흡혈귀들마저도 말이다.

그들이 일으킨 대혼란만큼이나, 그 냄새에 배가 뒤틀리는 것만큼이나, 그리고 그녀가 흡혈귀를 싫어하는 것만큼이나 아를린은 그들에 대해서 무언가 편안해지는 점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고역은 그 누구도 봐주지 않았다. 어둠의 거주자들이 인류를 없애 버리려 노력했지만, 멀지 않은 과거에 흡혈귀들은 인간과 같은 편이 되어 함께 싸웠다.

아를린은 다시 같은 편이 될 수 있기를 바랬다.

관문수호대는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찬드라는 활기가 없어 보였다. 이무기의 소굴로 걸어들어간다는 생각을 썩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카야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아를린 만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있었다. 이곳은 한때 사람들이 희망을 찾았던 장소라는 것을 말이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이 알고는 있어도 이해하지는 못하는 무언가였다. 진심으로는 말이다. 그런 갈증을 느끼면서도 대의를 위해 본능에 반하는 행동을 하다니. . .그녀는 소린 마르코프를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그에게 존경을 표할 수는 있었다.

또한 그녀는 자신에게 희망을 보여 준 천사의 기억에게도 경을 표할 수 있었다. 그 희망이 하얀 숫사슴처럼 알아차리기 힘든 모습이었다고 해도 말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계속해서 걸어가는 동안, 아를린은 울타리 문 바로 바깥에 멈춰섰다. 부서져 있는 아바신의 문양 반쪽을 덩굴들이 휘감고 있었다. 날카로운 손톱으로 덩굴들을 잘라낸 뒤, 그녀는 문양을 바로잡고 기도문을 읊조렸다.

"천사님, 이 밤을 지날 수 있게 우리를 보호하소서. . ."

놀랍게도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고, 목소리로 미루어 보건대 아델린이 분명했다.

테페리도 기도문을 익히느라 약간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따라서 참여했다.

찬드라도 곧바로 함께 기도했고, 말이 좀 빠르고 여기저기서 더듬긴 했지만 최선을 다했다.

마지막으로—한숨을 내쉰 뒤—거의 기도를 끝내고 있는 그들 곁으로 카야가 다가와서 함께 기도했다.

그들은 기도를 마친 뒤 서로를 마주보고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아무도 아를린이 왜 더이상 자신의 기도를 들어 줄 리 없는 천사에게 기도를 올리는지는 묻지 않았다.


마르코프 저택으로 가려면 다리를 건너야 할 거라고 말한 사람들은 이곳에 직접 와 본 적이 없음이 분명했다. 그곳으로 이어져 있는 바위로 된 가느다란 길은 평상시라면 입을 쩍 벌리고 있는 협곡 위에 놓여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위협적일 수 있었지만, 고역은 이곳에도 영향을 끼쳤다. 다리는 산산조각이 난 채로 떠 있었다. 한 조각에서 다른 조각으로 징검다리를 뛰듯이 건너는 것만이 저 부서져내리는 성으로 다가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훼손된 마르코프 장로의 얼굴들이 끔찍한 모습의 발판이 되었다.

안으로 들어간 뒤에도 상황은 그리 좋지는 않았다. 술잔들 위에는 먼지가 두껍께 내려앉아 있었고, 마을을 약탈하는 데 사용 갑옷들은 돌멩이처럼 발치를 굴러다니고 있었으며, 찢어지지 않은 초상화들은 검게 변색되어 있었다. 더 안 좋은 것은 이곳에서 아무 냄새도—죽음의 냄새도, 썩는 냄새도, 심지어 피의 냄새조차도—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아무도 없을 수도 있을까?" 찬드라가 물었다.

"그럴 일은 거의 없지," 카야가 말했다. "이곳은 엉망이지만, 버려져서 엉망인 건 아니야." 그녀는 머리 위에 매달려 있는 샹들리에를 가리켰다. "누군가가 촛불을 갈아끼웠어."

"스럴 짓이겠지," 아델린이 말했다. "하지만 카야의 말이 맞아—경계를 늦추면 안 돼."

"하지만 소린이 여기에 없다면? 그러면 그와 이야기를 할 필요 없이 그냥 열쇠를 훔치면 되잖아."

"없기를 기대는 해 보자," 아를린이 말했다, "하지만 있다고 생각하는 게 상책이야. 게다가, 대화를 하면 그도 납득할 거라고 생각해."

하지만 그녀가 그렇게 말하는 것과 동시에, 그들은 주변에 있는 돌과는 매우 다르게 보이는, 툭 튀어나와 있는 바위 한 개를 지나쳤다. 다른 돌들은 보이지 않는 적들을 겨누고 있는 단검과도 같이 날카롭게 뒤틀려 있는 모습인 반면, 이 바위는 마치 마르코프 저택의 얼굴에 난 상처와도 같았다. 바위에는 다른 어느 것들보다도 더 심하게 구멍이 여기저기에 나 있었고, 양쪽으로 깊은 고랑이 두 갈래로 길게 파여 있었다. 바위의 겉표면 또한 비슷하게 거칠었고, 그 가장자리는 마치 씹혀서 뜯겨나간 것처럼 울퉁불퉁해 보였다. 말라붙은 피로 얼룩진 부분은 그 광경을 더욱 섬뜩하게 만들 뿐이었다.

"썩 좋은 광경이 아니네," 아델린이 말했다.

"그건 나도 동감이로군," 테페리가 말했다.

카야가 나지막이 소리를 냈다. 그녀의 눈이 가늘어졌다. "누가 했든 간에, 이빨은 남아나지 않았겠네."

"소린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알거야. 열쇠를 노리는 게 우리 뿐만이 아닐 수도 있어," 아를린이 말했다.

"그가 여기에 있기나 한다면 말이지," 찬드라가 말했다.

하지만 소린은 여기에 있다. 그래야만 했다. 그 모든 일이 있은 뒤에, 그가 자신들을 피해다니고 있었다면. . .아를린은 이를 악물었다. 그녀는 어떤 식으로든 열쇠를 찾아낼 작정이었다. 토볼라르는 이니스트라드의 심장을 뜯어내려고 하고 있었고, 그녀는 그런 일을 일어나게 놔둘 수 없었다.

"그가 이곳에 있다면, 왕좌의 방에 있는 게 틀림없어," 아를린이 말했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있겠네," 카야가 말했다. "이 복도를 따라서 늘어서 있는 초상화들을 봐. 다 왕좌의 방으로 이어져 있는 게 틀림없어."

카야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그림이 많이 남아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길을 찾기에는 그 정도로도 충분했다. 그들의 앞에 세워져 있는 박쥐의 으르렁거리는 얼굴 조각이 새겨진 거대한 문은 경첩에서 떨어져 나오려 하고 있었고 이는 모든 것을 말해주었다. 그들이 문앞에 도착했을 때, 아를린은 늑대의 형상으로 모습을 바꾼 뒤 문을 열어젖혔다. 다시 사람으로 모습을 바꾼 그녀를 아델린이 바라보았다. 아를린은 그녀에게 친근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걱정 마, 난 집 안에서도 살 수 있도록 길들여진 늑대거든." 그녀가 말했다. 요즘에는 이 말이 얼만큼 사실인 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때때로 그렇게 농담을 하며 듣는 사람들을 안심시켜 주고는 했다. 숲속이라면 그녀는 거의 도망갈 뻔 했으니까.

하지만 오늘만큼은 그녀는 아를린이었고, 아를린으로 있을 생각이었다—저 먼지로 뒤덮인 왕좌의 방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왕자와 마주쳤을 때에도 말이다.

소린 마르코프가 저택의 부서진 왕좌에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다. 그는 낡고 표지가 없는, 일지 같은 무언가를 읽고 있었다. 천장에 난 구멍 하나가 그의 회색 피부 위로 한 줄기 달빛을 비췄다. 그는 버려진 저택의 공허한 찬란함에 싸인 채로 기이한 광경을 연출했다.

관문수호대가 들어설 때 그는 올려다보지는 않았지만, 아를린은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원한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소린의 목소리는 강력하고 거만했다. "나를 방해하려는 목적을 지금 바로 말해라, 아니면 내가 너희들 모두를 바깥까지 배웅해 주지."

"소린," 테페리가 말했다. 테페리가 나서는 것은 당연했다. 당연하게도 테페리는 위협을 받은 아무런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그가 보여 주는 궁중 예절을 본 귀족은 그 누구든 자신을 부끄럽게 여길 터였다. "다시 만나서 반갑군. 처리해야 할 사소한 문제가 있어서 말이지. 짧게 끝내겠네."

흡혈귀는 책 가장자리 너머로 테페리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당신이 짧다고 하는 걸 곧이곧대로 믿으면 안 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지. 이유를 대라, 당장."

테페리는 그래도 시도는 해 보려 했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우리는 은달빛 열쇠를 찾고 있다네. 밤이 점점 더 길—"

소린은 책을 탁 하고 덮었다. "안돼."

"안 된다니, 그게 무슨 뜻이지?" 찬드라가 말했다. "우린 엄청나게 오랫동안 그걸 찾아다녔어. 최소한 우리 사정을 들어 줄 수는 있잖아."

소린의 눈이 그녀와 마주쳤다. 찬드라는 입을 다물었다. 소린에게는 어딘가 포식자적인 면이 있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매혹적인 면도 있었다. 아를린은 피를 빠는 자들을 수없이 만나보았지만, 그중에서 이 남자와 비슷한 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마치 개와 늑대가 서로 다른 것과 비슷했다.

그에게서 포식자적인 면모가 느껴진다는 것은 분명했다. 그가 일어서는 몸짓이나 책을 옆으로 던지는 방식이나, 걸어나오는 발걸음, 그가 칼자루 위에 손을 올려놓고 취하는 자세에서도 그런 면모가 드러났다. "그렇게 충동적인 자가 내가 이 차원을 위해 얼마나 많은 것들을 이미 희생했는지를 이해하리라고는 기대할 수 없겠군. 만일 내 가족들이," 그는 그 단어를 으르렁거리듯이 내뱉었다, "그 영원한 밤의 무의미한 쾌락주위자로 추락해 버리기를 스스로 바라고 있다면, 난 이미 그들을 막기 위해 내 몫을 충분히 했다. 저들이 만찬을 즐기게 놔두라지."

찬드라의 바로 앞으로 테페리가 들어서며 두 손을 들어올렸다. "그녀의 말을 듣지 않겠다면, 내 말을 들어 보게. 이 차원은 자네의 가족이지, 소린, 그건 우리 모두가 알아. 자네는 훨씬 더 많은 일을 했어. 우리는 우리가 맡은 몫을 할 수 있게 열쇠를 달라고 하는 것이네. 여기 있는 아를린도 당신만큼이나 영원한 밤을 마주하고 싶어 하지 않아."

"과연 그런가?" 그가 대답했다. "이 차원을 위해 너희들이 무엇을 했는지를 말해 봐라. 어디, 들어봐 주지." 이제 그는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고, 칼이 칼집에서 미끄러져 나오고 있었으며, 아를린의 피 속에 숨어 있는 야수가 변신할 때라고 그녀에게 외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변신하지 않았다. 아직은 아니었다. 아를린은 돌로 된 땅바닥을 굳게 딛고 섰다. "당신의 과거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난 지난 몇 년 동안 여러 사람들의 말을 들으며 이곳저곳을 여행해 왔어요. 당신이라면 왜 사람들이 살아야 하는지를 다른 누구보다도 더 잘 이해하리라고 생각했죠. 아바신을 만든건 당신—"

그녀가 말을 마치기 전에 칼날이 허공을 갈랐다. 아를린은 자신의 초자연적인 반사 신경 덕분에 크게 상처를 입지 않을 수 있었다—그녀는 팔을 들어올려 검날을 받아쳤다. 그럼에도, 강철은 살점을 파고들었고, 붉게 그어진 긴 선이 바닥을 물들였으며, 검은 연기가 그녀의 눈을 따끔거리게 만들었다. 입 안에서 이빨이 더 길게 자라났다. 황금색 눈 두 개가 어둠 속에서 불타오르고 있었다.

"너는," 그가 울부짖듯이 말했다, "그녀에 대해 말할 자격이 없다."

"왜 그녀를 만들었는지를 벌써 잊어버린 건가요?" 아를린이 말했다. 찬드라는 이미 불길을 활활 태우고 있었고, 소린의 어깨 너머로 아를린에게 신호를 보냈다. 한 마디 말만 하면 다른 네 사람이 그에게 달려들 수 있었지만, 그녀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아직은 아니었다. "우리에겐 천사들이 필요해요. 우리에겐 희망이, 그리고 믿음이 필요하다구요. 우리에겐 낮이 필요해요—그리고 그 열쇠가 필요해요."

"나가," 소린이 소리쳤다. 텅 빈 벽들이 그 목소리를 사나운 메아리로 바꿨다. "당장."

"열쇠 없이는 안 가요," 아를린도 그에 맞서 똑같이 확고하게 대답했다. "당신은 잊었더라도 저는 잊지 않았어요."

그는 분노에 사로잡혀 칼을 위로 들어올린 다음 다시 내려쳤다. 아를린은 다시 팔을 들어올렸다.

하지만 그럴 필요는 없었다. 황금빛으로 밝게 빛나는 깃털 하나가 그들 사이에 떨어졌고, 그 직후에 왜가리의 머리처럼 생긴 낫이 그 뒤를 따라 내리쳤다. 소린의 칼은 천사의 무기에 부딪혀 쨍그랑 하는 소리를 냈고, 그는 난입한 자에게 분노를 드러내면서 뒤로 물러났다.

지금이 한밤중일 수도, 춥고 어두운 시간일 수도, 이니스트라드의 종말이 시작되는 시간일지라도 왕좌의 방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황금색 빛은 아를린에게 커다란 희망을 가져다 주었다. 그녀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천사의 신성한 기운에게서도 마찬가지로 전해졌다.

아바신은 더이상 기도를 듣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시가르다에게는 들린 것이다.

Sigarda, Champion of Light
Sigarda, Champion of Light | Art by: Howard Lyon

"소린 마르코프," 그녀가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낭랑했고, 사람 이상의 존재임을 나타내는 듯이 희미하게 메아리치는 소리가 되어 들렸다. "이렇게나 추락하다니. 돌에서 빠져나와 한 일이 풀죽어 있는 게 전부로군."

오면서 본 구덩이—그게 였단 말인가? 수백 년을 살아온 흡혈귀 왕자에게 연민을 느낀다니정말 이상하군.

그가 천사를 향해 자신의 칼을 겨눈 모습도 기이했다.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다는 것이냐? 모든 답을 다 알고 있다는 듯이 구는군. 어디 한 번, 설명해 봐라. 아니면 너도 저들과 같이 이곳에서 나가던가."

시가르다의 황금빛 눈이 가늘어졌다. 그녀는 소린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지만, 그녀가 이야기할 때는 마치 시가르다가 아를린의 편인 것처럼 느껴졌다. "아를린 코르드—네 믿음이 나를 이곳에 소환했다. 네가 간직하고 있는 명분은 정의롭구나. 네가 찾는 은달빛 열쇠는 3층에 있는 소린의 개인 방에 있다. 가거라. 나는 그와 그의 오래된 창조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야겠으니."

찬드라와 카야에게는 두 번 말할 필요가 없었다—그들은 계단을 향해 쏜살같이 뛰어나갔다. "고마워, 시가르다!" 찬드라가 푹신한 카펫을 밟으며 소리쳤다. 테페리 또한 예의를 갖춰 인사를 하느라 잠깐 멈춰섰을 뿐, 곧 뒤를 따랐다.

하지만 아를린과 아델린은 시가르다가 그를 향해 낫을 겨눌 때에도, 위험을 마주한 그의 얼굴이 더욱 짐승처럼 변하기 시작할 때에도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어떤 신성한 두려움이 그 자리로부터 발을 떼지 못하게 했다. 신실한 자들의 역할은 자신들의 우상을 도우는 것이 아닌가? 두 사람은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아델린은 자신의 방패를 치켜들었다.

"가거라!" 천사는 소리쳤고, 소린의 칼은 그녀의 방어구를 갈랐다. "나를 조금이라도 믿고 있다면, 가란 말이다!"

아를린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녀를 돕고 싶었다. 아델린이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우리는 방해만 될 뿐이야," 그녀는 아를린만큼 상심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그녀의 말이 옳았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기분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아를린은 아델린의 뒤를 따라 계단을 오르면서, 뒤에서 들려 오는 고통스러운 울부짖음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려고 했다. 그 중 몇이 천사의 비명이고 몇 개가 흡혈귀의 비명인지를 세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것은 그 자체로 천사에 대한 믿음이었다.

책장과 고대 무기가 가득 찬 방을 발견한건 찬드라였고, 은달빛 열쇠를 찾은 사람은 테페리였다. 열쇠는 동상의 내밀어진 두 손 위에 올려져 있었다. 동상의 목은 소린이 벴음이 틀림없어 보였고, 갑옷과 날개 덕분에 그 동상이 누구의 모습이었는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머리가 없는 아바신의 동상은 잘 차려 입은 젊은 소린과 그의 할아버지가 그려져 있는 초상화 아래에 놓여 있었다.

Moonsilver Key
Moonsilver Key | Art by: Joseph Meehan

아를린은 열쇠를 집어들었다.

그 날 두 번째로, 그녀는 기도문을 읊조렸다.

시가르다가 안전하기를, 그리고 자신들이 수확철 시간에 맞춰 돌아갈 수 있기를 기도했다.

하지만 천사들의 안전에 대해 천사에게 기도한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었고, 그들에게 시간을 더 달라고 청하는 것도 여전히 이상한 일이었다.

이니스트라드에서는 보장된 것이 아무것도 없다—하지만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 견디기 위해, 그리고 아침의 신성한 햇살을 다시 한 번 마주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